얼마 전 내 인생 첫번째로 공채 시험을 쳤다. 공채는 나에게 수험생이 된 듯한 느낌을 주었다. 수험장소인 학교 정문 앞에는 크게 'OOOO 신입 공채 고사장'이라는 하얀 플래카드가 걸려있었고, 정문 앞에는 OMR 싸인펜과 손목시계, 봉투 등을 파는 할머니들이 보였다. 뒤를 돌아보면 기도하는 부모님이라도 있을 것 같은 착각에 고개를 흔들며 고사실로 향했다. 시험 대행 업체인지, 아니면 그 기관의 사람들인지 모를 진행요원들이 고사장까지 늘어서 있었다. 내 수험번호를 확인하니 고사실 번호가 나왔다. 아닌게 아니라, 이렇게 대규모의 인력과 행정을 대동해야만 치룰 수 있는 수준의 지원자들의 목록이 환하게 펼쳐져 있었다. 어림잡아도, 이번 경쟁률은 500:1이 넘겠다는 계산이 나왔다. 또다시 고개를 흔들며 고사실로 들어갔다.
내가 일찍 온 것인지 고사실에는 무릎담요를 한 빨간 패딩을 입은 여학생 (... 정말 여학생처럼 보였다)만 노트 정리를 읽고 있었고, 내가 아마 2번째나 3번째로 도착한 지원자였을 것이다. 전지에 프린트 된 고사장 주의사항과 자리배치도를 칠판에서 발견하고, 내 자리를 찾아 앉았다. 맨 앞줄. 바로 앞의 검은 평면티비 화면으로 뒤의 모습이 다 보인다. 앞에 있는 1교시부터 7교시의 시간표는 새삼, 학생 시절의 공부가 얼마나 하루의 주된 의무였는지 떠올리게 했다. 분필은 더 이상 분필가루가 날리지 않게 촉촉한 재질의 워터초크로 바뀌어 있었다.
보는 둥 마는 둥, 가져온 자료를 읽다보니 첫 번째 시험이 시작되었다. 시험이라기 보다는, '인성검사'라는 것이었다. 인성검사라고 해서 뭘까 궁금했는데 요즘 흔히 말하는 기업의 인적성검사였다. 아주 많은 문항을 제한된 시간 내에 체크해야 하므로 깊게 생각하지 않고 두 문항 중 하나를 선택해 나가는 게 시험의 요지다. 인성검사 문제지 앞에는 '지원자의 성과 산출 능력을 측정하기 위한' 것이라는 짧은 문장이 쓰여져 있었다. 이 문장은, 그리고 인성검사는 참 많은 생각을 던져주었다. 조직의 성공과 성과의 산출을 위해, 미리 될 것 같은 싹만 걸러서 뽑겠다는 심산인 것이다. 인성검사에서 떨어진다는 것은 사실 '과 사의 바람직한 인재상과 귀하가 맞지 않음'을 뜻한다.
인성검사의 문항들을 보면서 이 회의감은 더욱 커졌다. '나는 레스토랑 서비스가 맘에 들지 않으면 불평을 하는 편이다', '나는 최대한 책임을 다하려 노력한다', '내가 세상을 지배하면 이 세상은 더 좋아질 것이라 믿는다', '나는 자살충동이 든적이 있다', '나는 다른 사람의 의견을 내 결정에 반영하는 편이다' 등등의 문항들을 나에게 가장 가까운 방향으로 찍어나가며 과연 이런 검사로 정말 사람의 성과 산출 능력을 판단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심지어 선택지가 2개 밖에 없기 때문에 2개 다 나의 이야기가 아닐 경우에는 그냥 둘 중에 하나를 찍는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 '나는 나의 의견과 반대하는 사람과는 이야기 하기 싫다'와 '나는 내가 한 선택에 후회를 자주 하는 편이다' 의 두 가지 선택지가 있는 경우 나는 나의 의견과 반대되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을 꺼리지 않고, 내가 한 선택에 후회가 항상 없는 편이기 때문에... '꺼리지 않는' 그 약한 편향성을 가진 문항을 고르기로 마음 먹는 것이다.
인성검사의 문항들은 자기중심/타인중심, 개인주의/집단주의, 신중/즉흥, 외향/내향, 직관/사고, 경쾌/우울 등 여러가지 인간의 성향이나 성격을 측정하려는 듯 보인다. 만약 이 인성검사에서 성향이나 성격의 카테고리가 8가지가 있다면, 나는 8가지 중 하나'이여야 만'한다. 이게 왜 인성을 검사하는 것인가? 인간의 성격은 무형의 재질을 가지고 끝없이 상황에 변하는 게 아니던가? 물론 한 개인을 어느 정도의 성향의 카테고리에 넣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 개인이 항상 그 성향으로 행동하고 판단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나는 '레스토랑 서비스가 맘에 들지 않으면 불평을 하는 편이다'에 체크를 했는데, 그것도 케바케다. 왜냐? 7천원짜리 밥 먹으면서 나는 서비스에 불평하지 않는다. 하지만 5만원 짜리 밥 먹으면 나는 불평할 것이다. 5만원 짜리 밥을 먹고 있어도, 나보다 서열이 높은 사람이 함께 있다면 불평하지 않을 것이다. 상황과 맥락의 변화에 맞추어 나의 행동과 판단을 적정수준으로 맞추는 것이 인간이고, 그렇게 인간 사회 속에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런 성격유형 검사로 밥벌이 하는 사람들도 있을 테니 이걸 폐지할 수는 없겠지만. 나에게 이 인성검사라는 것은, 수천의 익명의 개인을 몇 개의 성격/성향 범주로 카테고리화 하여 '말 잘 들을 것 같은', '일 열심히 할 것 같은' 일꾼을 뽑으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성과를 내는 역량이라? 기업이나 조직의 성과가 개인에 달렸다고 보는가? 보통은 부서와 팀으로 나누어진 그 다이내믹스에 달려있으며, 성과주의는 사실 그 내부의 필요없는 competition을 부추기기 때문에, 성과가 사실 성과가 아닌 경우가 허다하다. 이름 뿐인 상처랄까, 다들 다른 팀 이기려고 야근하고 열심히 하긴 하는데, 지나고 보면 크게 나아진 것 없는. 뭐 그런게 조직이 원하는 성과라면 나도 태클 걸 마음은 없다. 나랑 상관없으니까.
아니, 어쩌면 나랑 상관있을지도. 조직 문화라는 것은 그 사회의 문화와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다. 근무시간 외 이메일은 불법으로 규정한다는 빠리의 어떤 '이상하지만 부러운' 그 논의에 대하여, 그 논의는 프랑스 사회에서만이 가능한 것이다. 개인의 노동권이 조직의 경영 논리와 거의 대등한 사회이니까. 하지만, 지옥같이 높은 근무강도에 (노동시간 OECD 1위) 시간 외 근무와 오피스 정치가 삶에 배어들어, 결국 일과 삶의 균형을 지키기 힘든 이 한국의 조직문화는 개인의 노동권의 인정범주가 좁은 한국 사회의 문화에 기인한다. 그러므로 '감히' 조직이나 회사들은 지원자들을 체에 탈탈 털어 데려가고 싶은 '성격 및 성향'의 일꾼들만 골라잡을 수 있다. 그렇기에 일 년 15일 휴가 중 5일 쓰면서 야근에 철야하는 일꾼들을 거느리며 조직을 경영할 수 있으며, 조직의 profit의 증가율과 그 일꾼들의 salary의 증가율은 반비례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심히 괘씸하고 불쾌하다.
각설하고, 내 인생 첫 번째 공채를 치면서 첫 번째 인성검사를 치르고 나는 익명의 개인이 된 느낌을 받았다. 어떤 문항들은 날 불쾌하게 만들었고 (예를 들면, '나는 자살충동을 느낀 적이 있다' 혹은 '나는 누구를 때려서라도 목적을 이루려 한다' 운운), 어떤 문항들은 도대체 이러한 거지같은 문항으로 나의 어떤 성향을 파악하고 싶은 것인지 의심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거기서 바로, 모든 의욕이 사라져버렸다. 인성검사를 받으면서 내 인성의 가장 거지같은 부분 - 즉, 반항하는 나 -을 끌어낸 그 재주는 인정한다. 과연 오늘날의 기업과 조직들은 이런 식으로 사람을 분류하고 골라내는 이 행태에 대한 면죄부를 어디서 구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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