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운 여름, 책이라도 시원하게 읽어야 겠다는 생각에 책장에 집어든 설국. 첫 문장들부터 뭔가 나를 잡아끄는 부분이 있었다.
현 접경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오자 눈(雪)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소설의 첫 장에 이렇게 기차여행을 하며 눈고장으로 들어가는 시마무라의 나레이션이 시작된다. 물론 시마무라 보다는 시마무라의 눈으로 보는 눈으로 덮인 마을, 눈 속에 희미하게 빛나는 불빛, 건너편에 누군가를 간호하고 있는 여성 (요코), 그리고 기차 창에 반영된 그녀의 모습.. 그런 이미지들이 더 강하다.
나는 '설국'을 읽으며 '무진기행'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무위도식하는 남자 주인공이 자신이 살던 곳을 떠나 '어떤 곳'으로 향한다는 점. 그 '어떤 곳'에 도달하기 위해 물질적/상징적인 경계를 넘는다는 점. (무진기행에서는 안개, 설국에서는 터널과 눈)
그리고 그곳에 있는 여성들. (무진기행의 하인숙, 설국의 고마코와 요코)
물론 두 소설은 성격이 아주 다른 소설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인 여행의 모티프나, 남성이 여행을 떠나 여성 인물을 만나 일정한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나, 큰 사건 없이 심리묘사가 주로 이루어 지는 점들이 굉장히 유사하게 느껴졌다.
1.
'설국'은 사건이 소설을 끌고 가지 않는다. 주인공의 심리묘사와 상황, 정황, 인물묘사로 끌어간다고 해야할 듯.. 살짝만 닿아도 녹아버리는 눈의 속성처럼, 맑고 깨끗한 느낌의 묘사가 일품이다. 심미주의를 바탕에 깔고 있다.
시마무라와는 달리 생활 전선에서 게이샤로 열심히 살아가는 고마코를 묘사하는 부분.
여인이 문득 얼굴을 쳐드니까 시마무라의 손바닥에 눌러 대고 있던 눈꺼풀에서 코의 양쪽가에 걸쳐 발그레하게 홍조를 띤 모습이 짙은 분화장 밑에서 비쳐 보였다. 그것은 이 눈고장의 밤의 냉기를 연상시키는 한편 머리털의 빛깔은 너무나도 새까맣기 때문에 따스하게 느껴졌다.
인물묘사 뿐 아니라 심리묘사나 자연, 정황묘사가 정말 대단하다. 이런 부분에서 사람들마다 '설국'을 읽는 포인트가 달라질 것 같다. 주요 사건이나 인물들이 휘말리게 되는 이벤트가 거의 없다. 거의 내면에 푹 침잠하여,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의 주위를 관망하듯 말하는 게 시마무라의 특징이다. 나같은 경우는, 이런 관망/관조적인 시마무라에 비해, 생활에 침잠해 살아가며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며 살아가는 고마코가 대비되는 전체적인 구조가 마음에 들었다.
특히 기차칸에서 기차 창유리에 비친 요코의 모습을 보듯이, 시마무라는 그냥 자기에게 비친 고마코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큰 애정을 쏟거나, 도움을 주거나, 하는 것은 없다. 이런 관점에서 시마무라는 이 소설의 주인공이지만, 성격이 크게 드러나 있지 않다. 눈고장과 그 풍습, 고마코, 요코 등을 독자 대신 '바라보는' 연결고리 정도의 역할을 한다.
2.
그리고 이 소설이 왜 노벨문학상을 받았는지 알 것 같았다. 동양적인 애수, 회한, 그러면서도 일본의 전통과 문화를 전반에 잘 녹여 표현해 내고 있는 점. 서정적인 문체, 소설 전반에 녹아있는 동양적 애수, 한 인간의 심리묘사.. 이런 것들이 매우 감각적으로 완성되어 있다. 그래서 노벨상 위원회에서 당시 (1968년) 동양의 이 독특한 문학 걸작에 상을 주기로 한 것이 아닌가 싶다.
아직도 영미문학 혹은 유럽 문학이 아니면 '제3세계'라는 딱지를 떼기가 힘들다. 중남미 문학이면 왠지 환상적 리얼리즘일 것 같은 느낌이, 아프리카 문학이면 뭔가 모르게 근현대사에 대한 것 같고... 그 누구도 이완 맥그리거를 콕 찝어 '영국 작가'라고는 하지 않지만, 바르가스 요사는 '아르헨티나' 작가라고 하지 않는가? 주류가 아닌 문화는 결국 처음 시작부터 핸디캡을 얻고 가는 셈이다. 하지만 양날의 검이기도 하다. 잘 알지 못했던 나라 혹은 문화에서 온 문학적 성취가 운이 좋다면, 흐름을 탔다면 이렇게 문학상을 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절대로 '설국'을 문학적으로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노벨 문학상의 정치성을 꼬집는 것이다. 아무튼.. 언제부터 이렇게 노벨상에 집착했는지는 몰라도, 노벨문학상이 반드시 순수한 의미에서의 문학성이나 지적 성취로만 수여 되지는 않는 것이다. 작품이 훌륭하고 문학적으로 높은 성취를 이뤄야 하는 건 당연하지만, 각 나라에서 로비도 해야하고, 또.. 무엇보다도 운이 따라야 한다. 아무리 훌륭한 작품을 썼어도 사후에는 상을 수여하지 않기 때문에, 작가가 살아 있어야 하기도 하고.. 각 대륙을 돌아가며 주는 문학상의 특징 때문이기도 하다.
3.
마지막으로.
앞에서 설국이 무진기행과 참 비슷하다고 느꼈다고 말했는데. 하나 더 있다.
남성의 먼 타지에서 여성을 만나는 '판타지'가 있는 것 같다. 하얀 눈으로 가득차 어둡고 긴 터널을 빠져나와야 만날 수 있는 그 곳에, 눈이 맑고 홍조를 띈 아름다운 여성들. 판타지. 비포 선라이즈를 보고 유럽 여행에 대한 판타지를 키우는 것처럼.. 남자들은 이런 판타지가 있나보다. 이렇게 본거지를 떠나 머나 먼 곳에서 아름다운 여성을 만나는 플롯은 한국과 일본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많은 이야기들의 원형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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