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뮈의 '페스트'는 기록물처럼 읽힌다. 실제로 까뮈도 페스트가 소설보다는 '기록'으로 분류되길 선호했다고 한다. 알제의 '오랑'이라는 도시에 어느 날 갑자기 페스트라는 전염병이 확산되고, 도시를 참극으로 몰아갈 때 그 고립된 도시의 생활 양상이 어떠할 것인가, 그 속의 인간들은, 그 인간들의 총합인 사회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대한 까뮈의 상상실험 같기도 하다. 지나온지 얼마 되지 않은 2015년에, 나는 '에볼라'나 '메르스'와 같은 급성 전염병에 대해 직간접적인 공포를 느꼈었다. 에볼라 바이러스가 기니에서 발생해 시에라리온, 라이베리아 이 3국을 집어 삼키고 있을 때, 나는 같은 서아프리카 지역인 가나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얼마 되지 않아 '메르스 사태'도 경험했다. 그리고 그 때 느꼈던 감정들을 이 '페스트'라는 소설에서 다시 체험했다. 알 수 없는 무시무시한 힘에 대한 공포,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재앙에 대한 무력감, 책임자들의 무능력과 전염병이라는 공포 앞에서도 여전히 쪼개지고 갈라지는 사회 세력들. 공포심을 헤집고 나오는 인간의 이기심과 비이성.
'페스트'는 총 5부로 나누어져 있다. 처음 평화로운 도시에 쥐가 집단으로 죽어가며 페스트가 발병해가는 도입부인 1부, 그리고 페스트의 세력이 흥성해져 가며 처음에는 믿지 않았으나, 결국 질병상태가 개인과 사회의 삶을 잠식해가는 2부와 3부. 평행 및 소강상태 4부. 그리고 페스트 종식을 알리는 5부. 소설 전반에서 나는 과연 우리 사회라면, 2015년의 한국사회라면 이 거대한 재앙에 어떻게 대응했을 것인가를 흥미롭게 비교해가며 읽어나갈 수 있었다. 처음에 우리는 '설마..'하는 태도를 취한다. 마치 우리가 죽는 다는 사실을 평생 모르고 살다가 어느날 그 사실에 화들짝 놀라는 것 처럼 말이다.
p.79 사실 재화(災禍)란 누구에게나 닥쳐오는 것이지만, 그것이 우리 머리 위에 떨어졌을 때는 여간해서 믿기 어려운 것이 된다. 이 세상에는 전쟁만큼이나 페스트가 흔했다. 그러면서도 페스트나 전쟁이 터녔을 때 사람들은 언제나 속수무책인 것이다. 의사 리외도 모든 시민이 그랬던 것처럼 속수무책이었다. [....] 전쟁이 터질라하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오래가지는 않겠지. 너무나 어리석은 일이야." 전쟁이라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일일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래가지 말란 법은 없다. 어리석은 일은 항상 악착같다. 사람들이 늘 자기 생각만 하지 않는다면 그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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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에서 카뮈는 다양한 주제로 기록을 심화시켜 가지만 나는 추상성/관념과 개별성/개별을 대비하는 단락들이 마음에 많이 남는다. 결국 페스트가 없이 사는 삶이든, 페스트라는 큰 재앙이 불어닥친 삶이든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느냐는 달라지지 않는다. 영웅주의나 대의, 역사와 같은 거대한 개념/관념을 위한 이들도 타루처럼 페스트 종식에 열심일 수 있고, 개별자의 삶, 개별성을 지키기 위해 사는 이들도 리외처럼 페스트와 싸워나간다. 더이상 사망자 집계가 시민들에게 아무 감정적 동요를 일으키지 않는 참극 속에서 정치인의 말, 화려한 언변, 대의와 관념을 위한 것이라는 수사는 얼마나 비정확하고 무책임한가. 그 속에서 우리가 주목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 재앙을 헤쳐나가는, 특히 가장 앞에서 싸워나가는 리외, 타루, 랑베르의 마음상태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 누구도 희생하고 있지 않다. 해야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그 속에 말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하루하루의 (사망자)장부를 만들고, 사람들을 진찰하고, 격리하고, 그런 성실한 생활을 해야할 뿐이다.
p. 181 그렇다, 불행 속에는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일면이 있다. 그러나 추상이 우리를 죽이기 시작할 때, 우리는 그 추상에 대해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리외는 그것이 가장 쉬운 일이 아님을 알고 있을 따름이었다.
p.368 모든 일은 그야말로 최대한의 신속성과 최소한의 위험성을 가지고 진해오디었다. 아마 적어도 초기에는 가족들의 자연적 감정이 이것을 섭섭하게 생각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페스트가 유행하는 기간에는 그러한 감정의 고려를 염두에도 둘 수가 없었다. 즉 모든 것을 실용성을 위해서 희생시켰던 것이다. [....] 영웅이라든가 눈부신 어떤 행동이라든가, 정말 구경거리의 가치가 있는 것을 여기에서 전혀 말할 수가 없다는 것이 얼마나 유감스러운 일인가를 필자는 잘 알고 있다.
p. 338 "이봐요, 타루, 당신은 사랑을 위해서 죽을 수 있나요?" "모르겠어요, 그러나 아마 그럴 수는 없을 것 같군요. 지금으로서는.." "바로 그것이죠. 그런데 당신은 하나의 관념을 위해서는 죽을 수 있습니다. 눈에 빤히 보입니다. 그런데 나는 어떤 관념 때문에 죽는 것은 지긋지긋합니다. 나는 영웅주의를 믿지 않습니다. 나는 그것이 쉬운 일임을 알고 있으며, 그것은 파괴적인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내가 흥미를 느끼는 것은,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 살고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 죽는 일입니다.[....] 즉 이 모든 일은 영웅주의와느 관계가 없습니다. 단지 성실성의 문제입니다. 아마 비웃음을 자아낼 만한 생각일지도 모르나,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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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태도로 성실하게 싸워오던 사람들이 큰 감정의 동요를 겪는 장면도 있다. 이 장면은 그 필치가 깨끗하고 객관적이면서도, 뭔가 사람을 울리는 면이 있어 감동적이다. 하지만 그 부분에서 페스트와 종교에 대한 이야기가 더 심화되어 펼쳐지기 때문에 흥미롭기도 하다. 한 어린아이의 고통스러운 죽음을 모두가 목도하는 부분이다. 파늘루 신부는 페스트 발생 초기에 인간들이 타락했고 죄가 싸였기 때문에 응당 받을 벌을 받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죄가 없는 어린아이가 입술이 까맣게 타서 고통스럽게 오랜 임종을 맞이하는 것을 보고 그는 자신의 신념을 조금 바꾸어 나가는 것 처럼 보인다. 우리가 평화로운 시기에 있을 때, 종교는 많은 것을 설명해주고, 많은 것을 잊게해주며, 또 평화를 유지시켜준다.
그러나 큰 재화가 닥쳤을 때, 그리고 그 재화가 공격적인 기세로 끊임없이 긴 시간동안 공격해올 때, 즉 페스트의 시대에 종교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가. 오랑의 시민들은 종교 대신 미신과 괴담으로 더 이끌려간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하느님의 뜻에서 재해석해야 하는 일은 성직자의 일이다. 그러나 그런 재해석이 실제적인 효용을 가지는 지는 나도 의문이다. 나는 자고로 발 끝에 닥쳐오는 일은 "성실하게" 먼저 해결해야지, 이 일이 왜 일어나고 누가 계획했는지 생각하다간 쉽게 그 재화에 희생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카뮈도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모르나, 파늘루 신부는 자신의 신념을 '이상한' 방향으로 수정하고 고집하다가 결국 의사의 치료를 거부하고 죽는다. 특기할 점은 그는 페스트로 죽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이게 카뮈와 같은 1급 작가들의 능력인 것 같다. 어떤 판을 벌여놓고, 등장인물의 행로를 살짝 뒤틀어본다. 그리고 그곳에서 의미가 발생한다. 파늘루 신부는 어떤 미상의 병으로 죽는다. 지금 당장 말로 설명하기는 어려우나, 이 부분에서 눈길이 오래 멈췄음은 사실이다.
p. 437 물론 그 무죄한 아이들에게 가해지는 고통은 언제나 그들에겐 분노할 수 밖에 없는 일로 보였다. 그러나 적어도 그전까지는, 어떤 의미에서 추상적인 격분을 느끼고 있었을 뿐이다. 왜냐하면 죄 없는 어린애가 그렇게도 오래 임종의 고통을 느끼는 모습을 똑바로 바라본 일이 결코 없었기 때문이다. [....] 그때 그는 고통받는 그 어린애와 한몸이 되었으며, 아직 성한 자신의 온갖 힘을 다해서 그 애를 지탱해주려고 애썼다. [....]파늘루(신부)는 병 때문에 까맣게 타버린 그 어린애의 입을 바라고보 있었는데, 그 입은 어떤 나이의 사람들도 내지르고야 말 비명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고는 슬며시 무릎을 꿇더니 다소 숨이 찬, 그러나 멎을 기색도 없는 그 이름 모를 비명 틈에서도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아무도 부자연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느님이시여, 제발 이 어린이를 구해주소서!"
[....]
p.444 "여보세요, 선생님"하고 그가 말했다. 리외는 여전히 골이 난 태도로 몸을 돌리더니 격렬한 어조로 말했다. "허, 그 애는, 적어도 아무 죄가 없습니다. 당신도 그것을 알고 있을 거예요!"
[....]
p.456 가장 잔인한 시련조차도 기독교인에게는 역시 이득이 되는 법이다. 그러니 기독교가 당면한 문제에서 정말로 추구해야 할 것은 바로 그 이득이며, 그 이득이 어떤 점에 있으며 어떻게 해서 발견할 지를 아는 데 있다는 것이다. [....] 그러나 페스트 시대의 종교는 여느 때의 종교와 같은 것일 수 없으며, 비록 하느님은 행복의 시대에는 사람들의 영혼이 안식하고 향락하기를 허용하고 심지어 바라기까지 하시겠지만, 극도의 불행 속에서는 그 영혼이 과격하기를 원하고 계신다고 했다. [...] 신은 오늘날 스스로 창조하신 인간에게 은총을 베푸시어, 우리가 부득불 '전체' 또는 '무'라는 가장 위대한 덕을 다시 찾아서 실천해야 할 만큼 큰 불행 속에 우리를 빠뜨려놓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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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재미있었던 또 하나의 인물은 '코타르'이다. 그에게는 페스트가 사실 반가운 손님이나 다름 없어, 페스트의 시대에 더 유용하고 활발한 인물로 성장해간다. 어떤 연유로 경찰의 조사에 쫓기던 그는 페스트 발병으로 인한 행정업무 마비로 인해 뜻하지 않는 자유를 만끽하게 된다. 심지어 그는 자살까지 시도했던 참이었다. 그는 자신이 페스트에는 걸리지 않을 것으로 간주하며, 은근히 페스트가 더 퍼지기를 바라기도 하는 것 같다. 그리고 페스트가 사라질 무렵에는, '설마 사라지지는 않겠지'하는 태도로 안절부절 못 한다.
p.396 '그는 성장하고 있는 인물이다.' 어쨋든 외관상으로 그는 기분이 좋은 가운데 성장하고 있었다. [...] "물론 더 나아지지는 않겠죠. 그러나 최소한 모든 사람이 함께 당하고 있잖아요." 정말이건 거짓이건 간에 그런 생각이 코타르를 아주 명랑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그가 원하지 않는 단 한가지 일은 딴 사람들과 헤어져 있는 일이다. [...] 그는 혼자서 죄수가 되어있는 것보다 모든 사람과 함께 갇혀 있는 편을 더 좋아한다.
p.404 [....] 반면에 페스트는... 내 생각을 말할까요? 그들은 되어가는 대로 놓아두지 않으니까 불행한 거예요. 그리고 내가 말하는 것에는 다 근거가 있지요."
될 수 있는 한 그는 공포 속에서도 가벼운 상태로 있으려 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것을 누구보다 먼저 맛본 만큼, 내 생각으로 그는 이 불안의 잔인한 맛을 완전히 그들과 똑같이 느끼지는 못할 것 같다. 요컨대 아직은 페스트에 걸리지 않은 우리처럼, 그는 자기의 자유와 생명이 매일매일 파괴 직전에 있음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그러나 그 자신은 공포 속에서 산 일이 있으니까 이번에는 딴 사람들이 공포를 맛보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 덧붙이자면 그 공포도 그렇게 되면 다만 자기 혼자서 당하던 때보다는 덜 힘에 겨운 것 같았다. 이 점이 그의 잘못이며, 또 딴 사람들보다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결국 그는 딴 사람들보다 더 우리가 이해하고자 애써볼 가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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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에 페스트는 결국 제풀에 못 이겨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불길이 사라지는 동안에도, 마치 반지의 제왕에서 불길로 휘감은 괴물이 골짜기로 떨어지며 간달프를 휙 감아가는 것처럼, 종국에는 타루의 목숨을 앗아간다. 페스트의 종식에 기뻐하고 다시 재회하는 연인들, 불꽃을 터트리고 행복감에 도취된 도시의 모습은 이질적이다. 5부 마지막에 이르며 이 기록의 이유 즉, 이 소설의 존재이유가 리외의 입에서 나온다.
p.631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사람들의 틈에 끼지 않기 위해서, 페스트에 휩쓸려간 사람들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가해진 부정의와 폭행에 대해 최소한 추억만이라도 남겨놓기 위해서, 그리고 재화의 도가니 속에서 배운 것, 즉 인간에게는 경멸당할 것보다도 찬양받을 것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그대로 말해두기 위해서 말이다.
페스트는 아니지먼 전염성을 다룬 소설인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에 비하면, '오랑'의 시민들은 이성적이고, 절제적이며, 비야만적이다. 그 속에서 리외의 합리성과 은근히 빛나는 인간성도 긍정적으로 여겨진다. 사회와 인간을 바라보는 눈에 따라, 작가들의 '전염병 사회 실험'의 결과는 이렇게 판이하게 다를 수 있다. '페스트'의 경우, 페스트를 전염병으로서만이 아니라 생각과 논리를 가진 존재, 언제나 발생 가능한 재앙의 대표격으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실제로 나는 그렇게 해석하며 읽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의 마지막 단락은 날렵하게 여전히 떨리고 있는 것 처럼 생생하다.
p.632 시내에서 올라오는 경쾌한 환호성을 들으면서 리외는 그러한 기쁨이 항상 위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왜냐하면 그는 그 기쁨에 들떠 있는 군중이 모르고 있는 사실, 즉 페스트균은 결코 죽거나 사라지지 않으며 꾸준히 살아남아 아마도 언젠가는 인간들에게 교훈을 알려주기 위해서 또다시 저 쥐들을 흔들으 깨워 가지고 어떤 행복한 도시로 그것들을 몰아넣어 거기서 죽게 할 날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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