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띠지에서 손석희 앵커는 말한다. "그의 성향의 상당 부분이 나와 겹친다는 데에 경이로움까지 느끼면서 이 책을 읽었다"고. 나는 안도감을 느끼며 읽었다. 소위 '높은 분'이 된 사람 중에도 이렇게 합리적 개인주의로 무장한 분이 계시는구나.. 하면서 말이다. 이 책의 제목인 '개인주의자 선언'은 또 '공산당 선언'을 비튼 제목이라, 센스있는 제목에 이 책을 든 이도 적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나처럼 손석희 앵커님의 감식안을 믿고 집어든 이가 더 많았으리라.
책에서 가장 공감이 갔던 부분은 우리 사회의 '집단주의' 문화가 우리 스스로를 더 불행하게 만드는 전근대적인 양상으로 몰아가고 있고, 이 부분에서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근대적 의미의 개인주의'라는 주장이다. 물론 판사님이 밝히신 것 처럼 이 책은 한 개인의 심도있는 일기같은 기분으로 쓰기도 했고, 실제 사회과학자의 글만큼 논리나 증거를 제시하는 엄밀성은 약하다. 하지만 우리가 멀게만 느끼는 판사님이 자기가 소시민이라니! 게다가 개인주의자시라니! 판사님도 나처럼 주말에 아무렇지도 않게 업무 전화를 하는 상사들과 일상적으로 개인의 영역을 침해하는 행태에 대해 분노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글에서 저자는 이 책이 이 땅의 개인주의자들이 소수가 아니라 사실 조용한 다수임을 확인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는 맥락으로)라고 썼다. 그리고 그 만국의 개인주의자들 중, 속으로 항상 끙끙 제말 다 못해서 앓는 이 땅의 개인주의자로서 일종의 '사이다'처럼 시원한 기분으로 책을 즐겼다.
p.24 어른이 되서서 비로소 깨달았다. 가정이든 학교든 직장이든 우리 사회는 기본적으로 군대를 모델로 조직되어 있다는 것을. 상명하복, 집단 우선이 강조되는 분위기 속에서 개인의 의사, 감정, 취향은 너무나 쉽게 무시되곤 했다.'개인주의'라는 말은 집단의 화합과 전진을 저해하는 배신자의 가슴에 다는 주홍글씨였다. 나는 우리 사회 내에서가 아니라 법학 서적 속에서 비로소 그 말의 참된 의미를 배웠다. 그 불온한 단어인 개인주의야말로 르네상스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 문명의 발전을 이끈 엔진이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경우 이 단어의 의미를 조금씩 배우기 시작한 것은 민주화 이후 겨우 한 세대, 아직도 걸음마 단계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개인주의란 유아적인 이기주의나 사회를 거부하는 고립주의가 아니다. 개인주의는 근대 계몽주의, 합리주의와 함께 발전하며 서구사회의 근간을 형성했다. 합리적 개인주의자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사회를 이루어 살 수 밖에 없고, 그것이 개인의 행복 추구에 필수적임을 이해한다. 그렇기에 사회에는 공정한 규칙이 필요하고, 자신의 자유가 일정 부분 제약될 수 있음을 수긍하고, 더 나아가 다른 입장의 사람들과 타협할 줄 알며, 개인의 힘만으로는 바꿀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기위해 타인들과 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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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사소한 것에만 분노하는가'. 나는 길에서 흡연하는 사람을 보면 정말 불쾌하다. 나는 타인의 '끽연권'을 존중한다. 내게 있어, 적어도 현재는, 다양한 사회 현상과 충돌하는 주장들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개인의 자유'를 얼마나 존중하는가이다. 개인이 담배를 필 자유, 개인이 거리에서 집회를 열 자유, 개인이 마음 놓고 법적 휴가를 즐길 자유, 애를 낳지 않을 자유, 사치품을 살 자유. 타인에게 해가 되지 않는 다면 개인의 자유는 최대한으로 보장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남이 내가 깨끗한 아침 공기를 맡으며 보도를 걸을 자유를 담배 연기로 침해하면 화가 난다. 똑같은 이유로, 신호등 빨간 불에 머리통을 들이밀면서 내가 안전하게 걸어갈 '보행권'을 침해하는 운전자들을 보며 속으로 저주를 퍼붓는다 (거의 매일). 역시 같은 이유로, 정당한 노동권을 침해받으며 (침해의 종류는 너무 많아 여기서 쓸 수가 없다) 살아가는 내 친구들. 대학 교육 다 받고 번듯하게 자라난 내 친구들을 보며 그 회사와 그 상사를 실컷 욕하곤 한다.
이게 정말 사소한 것인가? 나는 사소한 것에 민감한 사람이, 더 거시적이고 사회적인 부조리나 부정의에도 민감할 것이라 가정한다. 나의 자유와 권리 그리고 책임에 대한 의식은, 개인과 국가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생각할꺼리를 많이 던져준다. 개인과 집단이라고 함이 더 옳을 것이다. 집단이 국가보다 더 넓은 정의 단위니까. 우리 나라는 어쩔 수 없이 역사적 사회적으로 국가주의적 이데올로기가 국민의 마음을 장악해왔다. 전근대적인 사회에서 근대를 체험할 여유도 없이 빠르게 이룬 경제발전 덕분에 의식수준이 졸부수준밖에 안 되는 행태가 매일 뉴스를 장식한다. 서유럽식 근대적 개인주의는, 근대적 개인들의 집합인 사회에서 충분히 그 장점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런데, 합리적 개인주의라는 이 이상적인 이데올로기는 안타깝게도 현재 이 땅에서 금방 이뤄지기는 힘들어보인다. 2015년의 우리는 점점 더 국가주의로 회귀하는 것만 같다. 홍콩과 중국의 우산시위를 보며 딴 나라 일이라 생각했던게 우습다. 표현의 자유는, 현재 한국에서 단언컨대 위기상황이다. 개인이 하고싶은 말을 무서워서 하지 못하는 곳(언제나 주어를 생략하는 게 일이다)에서 어떻게 21세기 필요한 창조성과 개방적 사고가 가능할까? 창조경제는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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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설하고, 지인들에게 하나씩 사서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다. 글 하나하나도 짧고 일상의 편린/일기처럼 글을 쉽게 쓰셔서 머리싸고 책 읽을 필요가 없다. 이 땅의 개인주의자들은 자기 확신을 얻을 수 있다. 내가 이상한 놈이 아니었다는 것. 개인주의의 근저에서 서성거리는 이들은 합리적 개인주의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 집단주의자들은 아마 이 책을 불태울 것이다. 진시황이나 나찌 시대에서 가장 쉽게 대중을 현혹하고 쉽게 이끄는 방법은 바로 책을 불태우는 일이었다. 똑똑한 놈들만큼 다루기 어려운 족속은 없으니까. 그러나 문유석 판사님이라는 분이, 저렇게 사법의 영역에서 합리적 개인주의를 실천하고 있음을 알게 된 것. 그것은 위안이 된다. 그리고 철저하게 개인주의자로서 아무 소득없는 글을 취미로 자신을 공유해주시는 것. 그것에는 감사하다.
만국의 개인주의자들이여, 싫은 건 싫다고 말해라. 그대들이 잃을 것은 무난한 사람이라는 평판이지만, 얻을 것은 자유와 행복이다.
p.s. 문유석 판사님 글에는 다양한 책들이 레퍼런스로 제시된다. 몇몇 책들은 읽어보기 위해 메모했다. 특히 스티븐 핑커의 책들.
p.s. 아무래도 이 책을 위해 글을 쓰신게 아니라, 지금까지 매체에 기고하거나, 미리 써두었던 글들을 모아 출판해서 중간에 흐름이 끊기는 기분이 든다. 앉아서 다 읽는 책이 아니라 짜투리 시간에 3-4편씩 신문 사설 읽듯 읽으면 좋을 듯. 그런데 1장은 심하게 공감하는 바람에 앉아서 한달음에 다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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