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의 '책읽는당'에 또 당첨되어 생애 처음으로 우루과이 소설을 읽어보게 되었다. 우선 책표지 질감과 낡은 듯한 스크래치가 마음에 든다. 사람이 기는 것 같기도 하고, 산세를 표현한 것인지 혹은 의미없는 선과 점의 나열일 뿐인지 모를 그림 (?)도 소설에 대한 궁금즘을 증폭시킨다. 우루과이라면, 우루과이 라운드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내가 잘 모르는 라틴아메리카의 한 나라. 옛날에 일하면서 라틴계 나라들의 GDP를 조사하면서, '어? 우루과이는 좀 사네?' 했던 기억도 난다. 그래서 우루과이의 소설,이라는 정보만 가지고 소설을 펼치며 잘 감이 오지 않았다. 어떤 소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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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쉽게 읽히는 소설이다. 우루과이 수도인 몬테비데오의 무역회사에서 일하는 50대를 바라보는 화자의 일기형식으로 되어있어, 관념적이라거나, 형이상학적인 부분이 거의 없다. 아주 잘 읽히고, 이 주인공의 생각과 일상이 마치 우리들의 것인양, 객관적일 수가 없다. 흔히 내 친구들은 '하..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하며, 신세한탄을 할 때 자조적인 탄식을 내밷곤 한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인생에서 이루어 낸 것이 없고, 이루어 낼 것이 있다는게 가능키나 한가? 하는 자조적이고 운명론적인 염세주의자의 일기. 그는 무신론자도, 불가지론자도 아니다. 오히려 허무주의적 유신론자처럼 보인다. 신은 있겠지만, 신이 나같은 존재에게 신경을 쓸리가 있을까? 그가 그의 인생에 의미를 찾은, 사랑을 발견했을 때 그가 끝없이 그녀의 처지와, 그녀의 반응과, 그녀의 마음에 몰두하는 것은 당연하다. 허무한 인생에 그에게 살아갈 의미를 주는 그 대상 외에 무엇이 있단 말인가? 그의 세 아이들도, 이웃도, 일도, 친구들도, 사회도, 죽은 전처 이자벨도, 막 발견해낸 아베야네다와의 사랑에 비하면 부차적인 것 아닌가?
그래서 '휴전'이라는 소설의 제목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아베야네다가 독감으로 죽은 후, 4개월의 공백 후 일기에 이렇게 쓴다.
" 하느님이 내게 암울한 운명을 주신 건 분명하다. 잔혹하진 않다. 단지 암울할 뿐. 하느님이 내게 휴전을 허락하셨다는 건 분명하다. 처음엔 이러한 휴전이 행복이라면 믿지 않으려 했다. 온 힘을 다해 저항했지만, 결국 굴복했고 그렇게 믿게 되었다. 그러나 단지 휴전이었을 뿐, 행복은 아니었다. 이제 또다시 나의 운명에 휘말렸다. 전보다 더 암울하다. 훨씬 더."
그는 이베야네다와의 만남의 전조부터 그녀의 죽음까지 허용'되었던' 휴전 기간동안 일기를 써내려갔다. 그리고 은퇴 전 날을 마지막으로 그는 더 이상 일기를 쓰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부재하고, '무기력'과 '절망'에 절실하게 굴복하는 은퇴 이후의 인생. 넘치는 시간 속에서 그는 더 이상 일기를 쓰지 않을 것이다. 쓰지 못 할 것이다. 비관, 절망 그리고 의미의 부재. 마치 우리네 마음 속을 투영한 것 같다. 더 이상 진실한 일기가 쓰여지지 않는 시대와, 진실한 일기를 쓰지 않는 개인들. 그 누가 희망을 말하는가? 그 누가 정의와 의미와 진실을 논하는가? 다 거짓 일기다. 잘 알지도 모르면서, 깊게 생각하지도 않고 도출된 가볍고 가치없는 거짓부렁들. 그렇게 거짓으로 넘쳐 흐르는 일기들을 읽고 있자면, 정말 나라도 일기는 안 쓰는게 나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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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서의 허무주의와 책 날개에 실린 작가 마리오 베네데띠의 인생은 사뭇 모순을 이루는 듯 하다. 옛 실존주의 철학가들은 발가벗겨져 나약한 실존을 가진 인간이 자살을 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 라고 물을 정도의 허무주의 극단까지 탐험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우리는 그 허무주의가 더 건강하게 발산한 예들을 많이 알고 있다. 사르뜨르. 베네데띠. 공교롭게도 둘 다 좌파 지식인으로 사회활동과 운동에 참여했다. 나는 생각했다. 허무주의로 무장한 이들만이, 순간의 '행동'으로서 생의 의미와 실존을 표출하는게 아닐까? 신도 없고, 권위도 없고, 진실도 없을 때, 인간은 결국 '행동'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행동이 결여된 희망과 낙관주의가 가득한 사회가 오히려 더 해롭고 부패한 냄새를 풍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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