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밀란 쿤데라 소설이 참 좋다.
이유를 따지라면, 쉽게 읽히는 연애소설 같으면서도 중후한 안개가 깔린 느낌때문일까?
혹은 전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주제의식이나 분위기 때문이려나..
정체성은 1997년도 작으로 쿤데라의 전집에서 아홉번째에 해당하는 경장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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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 샹탈과 장-마르크의 이야기.
자신이 A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A가 아닌 것 같을 때, 나는 내가 B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B가 아닐 때,
현대인의 정체성은 어떤 형식으로 규정되는 것일까?
남이 나를 규정짓는 것은 먼 해변에서 바라본 검은 실루엣처럼 단면에 지나지 않는다.
장-마르크는 소설 서두에 해변가에서 자신이 샹탈이라 굳게 믿은 실루엣이 전혀 다른 사람임을 깨닫고 깜짝 놀란다.
샹탈 역시 장-마르크가 써보내는 거짓 연애편지에 속아 조금 씩 '다른' 면모를 보인다.
샹탈과 장-마르크는 소설에서 서로 번갈아 가면서 목소리를 내는데,
그들이 서로에게 목격하거나 들은 것들을, 서로 다른 함의와 함축으로 해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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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호접몽 레퍼토리.
현실과 비현실, 즉 현실과 꿈의 경계선이 모호해지는 그 순간.
동양권의 사람들에게는 친숙한 모티브지만, 서구에서는 (당시) 새로웠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이 각자, 혹은 함께 겪은 그 많은 일들이 사실 꿈이라면?
누가 꿈을 꾼 것일까?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부터 비현실인지 모르겠다면?
타인의 인식과 자신의 자각으로 형성되는 개인의 '정체성'이라는 것도 모래위의 누각같은 것일까?
그리고 소설은 마지막 짧은 장으로 끝맺는다.
[....] "나는 더 이상 당신으로 부터 눈길을 떼지 않을 거에요. 쉴새없이 당신을 바라보겠어요. [...] 내 눈이 깜빡거리면 두려워요. 내 시선이 꺼진 순간 당신 대신 뱀, 쥐, 다른 어떤 남자가 끼여들까 하는 두려움."[...]
"밤새도록 스탠드를 켜놓을 거예요. 매일 밤마다."
눈을 떼지 않고 타자를 끊임없이 바라봄으로써,
적어도 자기 자신에게는 확고한 자신과 타자의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노력?
눈을 감으면 보이지 않는 세계는 '의심'할 수 밖에 없는 데카르트스러운 인간 한계의 극복?
아무튼 쿤데라는 읽으면 사실 잘 모르겠다.
그래도 재밌어서 읽고 또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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