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적으로 생각해라.
긍정적인 사람이 되어라.
긍정적인 사고를 가져라.
입시지옥을 견디던 고등학교 시절 일기장에 써내려갔던 주문들,
삶에 치일 때 나를 다독였던 그 수많은 '긍정'의 메세지들..
그렇게 내가 힘들고 허덕일 때 고삐를 다시 매고, 눈을 들어 행군할 수 있게 해준
그 다양한 층위의 '긍정'의 향연이 사실은 이데올로기로 읽힐 수 있다는
새로운 깨달음을, 나는 이 책을 읽고 깨달았다.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이 '긍정성'이란 실제 상태나 기분이 아니라
세상을 설명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결정하는 이데올로기의 일부라고 말한다.
지금 이대로가 좋고, 불쾌한 가능성이나 '부정적'인 생각을 억누르고
쉼없이 마음에 채찍질을 가하고 쉼없는 노력을 해나가는 것 ..
그게 우리가 가져야 한다고 항상 들어왔던 '긍정성'의 핵심이 아닌가?
각종 의학용어와 미국 역사 속의 칼뱅주의, 신시대 (New ages), 소비자 자본주의의 출연 등
낯선 사회과학적 맥락 속에서 쓰인 글이지만, 메세지는 확실하다.
'긍정'은 나를, 당신을, 그리고 우리를 배신했다.
외부에서 일어나는 끊임없는 변화와 알 수 없이 흐르는 사회의 성장 과정에서,
자본주의가 소비자 자본주의로 흐르고 자본이 모든 것의 변수가 되어버린 첨단으로 흐르면서
'긍정적으로 되라'는 메세지는 화이트 컬러에게는 하나의 의무가 되버렸다.
기업 구조조정은 환영해야할 진보적인 변화이고, 실업은 개인에게 주어진 새로운 기회이고
부정적인 세계 인식에서 벗어나 현실을 아주 긍정적으로 바라봐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내가 속한 이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든 그건 나의 마음가짐이 초래한 결과다.
괴로움을 극복하고, 긍정적이고 매력적으로 태도를 변화시키면
'긍정적'인 변화를 삶으로 '끌어들이고', 부자가 되고, 행복한 가정을 가질 수 있다..
자신의 마음을 제어할 수만 있으면 무한한 힘을 얻게 된다는 이 '긍정의 세계관'이
거의 종교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초대형 교회의 '긍정신학'이 되고, 초국가 대기업의 '긍정 경영'이 되고,
개인에게는 '긍정'으로써 구하는 것이 체화된다.
외부에서 무슨 일이 - 특히 부정적이고 회의적인 - 일어나든
모든 것이 '당신'. '나'에게 달려있다! 긍! 정!
이것은 공교롭게도 후기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와 짝짜꿍이 잘 맞는 조합이었고,
그렇게 동기를 유발하고, 자아를 채찍질 하는 '긍정'적이고 환경에 '순응'하는,
기업이 무차별으로 다운사이징을 하고 대량 해고를 하고, 삶의 벼랑에 내몰리면서도
'긍정'적으로 자신을 다독일 줄 아는 그런 인구가 필요해진 시기이니까.
그러나
'긍정적'이라는 단어는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다.
긍정적, 부정적 사고 모두 감정과 지각을 구분하지 못하게 한다.
이 세상의 자기 감정과 환상의 프레임으로 바라보게 한다.
이러한 경향의 대안은 내 자신에게서 벗어나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위험과 기회가, 확실한 죽음과 또한 커다란 행복도 다 뒤섞여 있다는 것을 '지각'하는 것이다.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은 '긍정적' 사고가 아니라 '비판적'사고이다.
비판적 사고란 본질적으로 질문을 할 줄 아는 것이고, 질문을 하기 전에 회의를 품을 줄 아는 것이다.
우리가 문명이라 불러온, 이렇게 필사적으로 매달려 지탱하려 애쓰는 이 인간사회는
'주술'과 '감정'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이 세계가 인과관계와 개연성, 혹은 우연이라는 자체의
알고리즘에 의해 전개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알고리즘을 탐구하며 진보를 거듭해 왔다.
오늘의 빵과, 저 먼 미래의 진보 - 어쩌면 나랑 전혀 상관없을지 모르는 이 인류 전체의, 그 진보사이에서
생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마 손쉬운 '오늘의 빵'일 것이다.
'누가 내 치즈를 옮겼'든지 간에 치즈가 사라졌으면, 바로 다른 치즈를 찾아나서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왜 나의 '치즈'가 사라졌으며, 어디로 사라진 것이며, 그 사라짐의 배경에는
어떤 사회경제적 맥락이 자리하고 있는지 사유해보는 것은 큰 차이를 만들 수 있다.
비판적 사고는 큰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고,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
Quotes - 저장용.
내면의 자아를 탐색하는 것은 분명 바람직한 일이다. 문제는 왜 그렇게 내적인 부분에만 오로지 몰입하는가 하는 점이다. 왜 사랑과 연대감을 품고 다른 사람에게 손을 내밀지 않는가? 깨달음의 빛을 찾아 자연세계를 가만히 들여다 볼 수는 없는가? 에머슨이 말한 것 처럼, 탐색할 광대한 세계가 밖에 펼쳐져 있는데, 어째서 불안한 자기성찰 속에 틀어박히려 하는가?
화이트칼라 무산계급이 날로 증가하면서 고용주와 고객, 동료, 잠재고객에게 더 호감을 줄 수 있는 모습을 만들기 위해 자아를 훈련시키는 것이 직업 생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적절한 사회 안전망 구축을 위해, 혹은 더 인간적인 기업 정책을 요구하기 위해 사회운동에 참여할 수도 있찌만 그러러면 평생 노력을 바쳐야 한다. 지금 당장 가능한 것은 현실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것 뿐이다. 부정적인 인식에서 벗어나 현실을 기껍게 받아들이고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기업이 해고된 노동자들과 과로에 시달리며 아직 버티고 있는 직원들에게 주는 최대의 선물, 긍정적인 사고다.
구하는 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초대형 교회와 직장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 초대형 교회 건물은 기업 사무 건물이나 본사와 흡사하다. 목사는 성직자용 예복이 아니라 주로 정장차림이다. 종교적 상징과 상은 사라지고 없다. 게다가 핵심 철학에서 기업과 교회는 같은 메시지를 전한다. 앞으로 나아가고, 장애물을 극복하고, 긍정적 사고를 통해 바라는 것을 손에 넣으라고 한다. 더구나 목사들은 으레 자유기업 체제와 그것이 일반 노동자들에게 요구하는 내용에 찬동하기 때문에 기업과 교회의 유사성은 더욱 짙어진다.
전공이 문학이든 공학이든 권위있는 인물에 도전할 능력이 있어햐 하고, 동료들의 생각과 배치되더라도 밀고나가 자신의 새로운 관점을 방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학계가 반대의견을 그 자체로 인정하기 때문이 아니다. 긍정적 사고의 권위자들이 하지말라고 경고하는 바로 그 '지나친 합리성'을 추구하고 진지하게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야 말고 사회에 필요한 인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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