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엉뚱하게도 (?) 경제학의 정의가 생각났다. 유한한 자원을 가지고 무한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선택을 연구하는 학문. 수식과 각종 그래프에 가려져 있지만 경제학은 '선택의 학문'인 셈이다. 그리고 다양한 개인과 다변하는 상황을 통제하기 위한 경제학의 마법의 주문은 바로 쎄떼리스 빠리부스 (Ceteris Paribus)! 다른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면! 호잇!
이 영화의 쎄데리스 빠리부스는 바로 회사에는 딱 16자리 밖에 없다는 것이다. 17명 중 3-4 명을 해고시켜야 하거나, 사장이 대인배라서 사정을 봐주고 17명 다 쓰기로 했다던가, 혹은 경기가 활황이라서 산드라가 짤려도 딴 데가서 쉽게 일 구할 수 있다거나 하는 여러가지 상황은 배제된다.
2.
먼저 영화적 상황에 대하여. 영화에 나오는 산드라의 동료 16명은 '산드라의 해고'냐 '1,000유로 보너스'냐의 양자택일을 해야한다. 그리고 산드라 역시 '포기할 것'인지 '16명 중 과반수를 설득할 것'인지 끝없는 선택의 순간에 당면하고, 뭐 영화에서는 큰 비중이 없지만 나에게는 약간의 생각거리를 준 이 벨기에의 태양열판 중소기업의 사장 역시 막판에 가서는 '과반수가 나오지 않으므로 산드라를 해고할 것'인지 '팀 분위기를 위해 산드라를 복직시킬 대안을 내놓을 것'인지 선택했을 것이다.
산드라가 첫 번째 동료, 두 번째 동료... 그렇게 동료들의 전화번호와 주소를 수소문하여 설득을 하는 과정은 자존심은 땅에 두고 짐짓 태연한 태도로 자신의 방어 마지노선을 지켜내야 하는 힘든 '싸움'이다. 남편 마누는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이 보여줄 수 있는 거의 최고의 인내심과 포용력으로 그녀를 응원하고 지원한다. 그리고 동료 줄리엣과 로베르 역시 이 싸움의 출발선부터 그녀 옆에 있었던 동료 지원군들이다. 그녀에게는 지원군이 있다. 이건 아주 중요하다.
산드라는 우울증을 막 극복하고 이제 약으로 조금씩 다스리면서 생활을 해나가기 때문에, 자기 혼자 내면의 목소리에 빠진다면 쉽게 무너질 수 있는 인간상으로 그려져 있다. 실제로 그녀는 이 해고 얼티메이텀을 받은 순간부터 동료들을 하나하나 설득하러 가는 그 순간마다, 자신을 꾸짖고, 자신의 무존재스러움을 경탄하고, 울고 짜고, 입술을 부르르 떨며 무너지는 모습을 보인다.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은 설득의 장면은 마지막 3명 뿐인 듯 하다.
어떻게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고 싸움을 지속할 수 있었던 걸까? 그녀는 6명의 지지를 얻고 1명의 swing vote를 얻어냈던 순간에 신경안정제 한 통을 입에 다 털어넣고 자살기도를 한다. 결국은... 자존심의 최소방어선과 자기모멸감은 짧은 시간에 여러 번의 상처를 입는 순간 허물어져 버리는 걸까? 그리고 그 순간 아랫층에서 천사의 목소리가 들린다. '산드라! 이리 와서 이것 좀 봐봐!' 그 목숨을 버리려던 극단의 순간에 자신의 친구가 남편을 버리고 자신을 지지하기로 결심했음을 알게된다.
남은 동료들을 설득하러 가는 차 안, 뒷 자석은 더 이상 비어있지 않다. 산드라를 지지하기 위해 결혼까지 버린 그녀의 친구가 앉아있다. 그들은 즐겁게 락큰롤을 부르며 마지막 설득의 작업을 마친다.
3.
산드라는 약한 인간일까? 기분에 좌지우지 되는 인간일까? 산드라 자신에게 동료의 복직와 1000유로의 보너스 중의 양자택일을 제시했다면 그녀는 아무 거리낌 없이 동료의 복직을 택했을까? 아니. 오히려 산드라라는 한 인간을 어떻다하고 규정하는 것은 이 영화의 목적이 아니다.
이 영화는 산드라와 그녀의 동료들이 바로 '우리'임을 인지시킨다. 선택으로 인한 전락의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선택의 기로에 놓인 인간. 가끔은 우리도 저렇게 극한의 가치를 대변하는 선택을 해야할 때가 있다. 왜냐하면, 결국 우리는 모두 유한한 자원으로 무한한 욕구를 충족시켜야 하는 인간이고, 그 인간들이 사는 세상의 일원이니까.
그러므로 다르덴 형제가 제시한 이 싸움의 마지막 부분은 당연하게 느껴진다. 산드라의 복직 찬성 8명, 그리고 복직 반대 (보너스 포기) 8명. 50대 50. 나라면 어떨까? 이게 바로 지금 내가 구직을 하는 상황이고, 이 선택에 내가 가진 많은 것이 걸려있다면? 50대 50 아닌가? 당신의 어떤 마음은 산드라를 저렇게 해고되도록 하는 데 죄책감을 호소하고, 또 당신의 어떤 마음에는 집에 매달 붙는 집융자금이 어른거릴 것이다. 그래서 50대 50은 실체적이고 꽤나 공정한 결론이라 생각했다.
4.
그렇다면, 마지막 산드라의 선택은? 자신은 자신을 지원해준 계약직 직원을 밀어내고 자리를 차지하기 보다는 사장에게 Au revoir, 인사하고 오피스를 뜨는 편을 택한다. 그녀는 새삼 그녀를 항상 지원하고 사랑해준 남편이 있고, 처음부터 재투표를 도와준 줄리엣, 어려운 양자택일의 상황에서도 자신을 지지해준 동료 8명에게 무한한 감사를 느낀다.
자신의 싸움에 동참해준 그들이 있었기에, 그녀는 그녀가 가장 행복한 선택을 마지막에 내릴 수 있었다. 마누와 통화하며 'Je suis heureuse', '나는 행복해'라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회사 주차장을 걸어나가는 그녀의 뒷모습. 그녀의 뒷모습도 웃고있었을 것이다.
5.
다시, 경제학으로 돌아와서. (주류)경제학 세계 속의 인간은 합리적인 인간이다. 한 개인의 효용함수에는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함으로써 얻을 이익만이 포함되어 있으며, 타인의 슬픔이나 외부적 요소는 그 개인의 합리성에 어떤 위해도 가하지 못한다. 산드라의 복직을 찬성한 8명은 이 맥락에서 말하자면 합리적인 개인들이다. 그들이 비윤리적이어서가 아니라 (물론 비윤리적인 것 같은 젊은 새끼가 한 놈 있긴 하다), 그들 역시 1,000유로가 굉장히 큰 도움이 되는 하루하루의 생활인이므로 그 합리성을 최대한 발휘하는 방향으로 선택했을 뿐이다.
그러나 산드라의 복직을 반대하여 보너스를 포기한 8명을 비합리적이라고 할 것인가? 아니올시다. 영화를 본 관객들은 산드라를 지지해준 그 8명의 얼굴 하나하나에 더 눈길이 간다. 이렇게 와줘서 고맙다고 돌연 눈물을 흘리던 히샴, 산드라의 지지요청을 들어주다가 얼굴에 한 방 먹은 그 이름모를 동료, 생활비를 위해 주말에는 타일을 주워 소일거리를 하던 동료, 그들 모두는 우리 같은 생활인이다. 산드라가 동료네 집 문을 두드릴 때마다 언제나 아내나, 아이나, 그 누군가가 먹여살리는 인물들이 등장하지 않던가? 1,000유로에 마음이 흔들릴 수 밖에 없는 생활인들. 미생.
그리고 나 역시도 한 명의 관객으로, 또 한 명의 생활인으로 눈물을 흘리며 생각했다. "당신들은 비합리적인게 아닙니다. 생계의 약간의 편리 대신 자신의 동료의 손을 들어주었을 뿐인, 그냥 다른 선택을 하였을 뿐입니다..."
그렇게 '다른' 선택을 한 8명이 있었으므로, 또 종국에 '다른' 선택을 한 산드라가 있었고. 그녀는 행복했다. 새해 벽두에 만난 다르덴 형제의 이 영화. 시작도 그냥 심상하더니 끝도 심상하다. 엔딩 크레딧에는 심지어 음악도 안 나와서 우두커니 검은 화면에 하얀 글자들만 올라가는 형국이다.
그래도 관객들은 쉬이 일어날 생각을 하지 못 했다. 거기에 그렇게 앉아 음악없는 엔딩크레딧을 바라보았다. 심상하게. 어떤 선택을 생각해보며..
p.s.
집에 걸어오면서 왜 영화제목이 Deux jours, une nuit (Two days, one night)일까, 생각해보았다. 누가 지었는지 모르지만 한국제목인 '내일을 위한 시간'도 '내일'과 '내 일'의 오묘한 상극이 느껴지는 좋은 제목이지만.. 원제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산드라와 줄리엣은 금요일에 겨우 사장을 만나 월요일의 재투표 다짐을 받아낸다. 산드라가 16명의 동료중 과반수를 설득해야할 시간은 주말, 즉 two days, 이틀간이다. 토요일은 남편이 레스토랑에서 일을 하므로 혼자 설득을 하러 다니다가, 한 밤 (one night) 자고 일요일에는 남편이 운전해주는 차를 타고 설득의 여정을 계속한다.
그리고 월요일 재투표 전 날, 그렇게도 다사다난하고 거의 목숨의 방전위기가지 갔던 순간을 포함한 긴 주말 후, 산드라는 쉬이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 같다. 뜬 눈으로 밤을 새웠을 것 같다. 그래서 결국 월요일의 재투표는 Two days, one night 이후 최후통첩을 받는 시간이 된다.....라는 나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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