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소록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한센병은 지금은 완치도 가능하고, 사람들의 편견도 상대적으로 적어진 편이지만 옛날에는 '문둥병'이라 하여 천하에 몹쓸 전염병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래서 일제시대부터 한센병 환자들을 섬에 가둬놓고 일종의 게토를 만들었던 것이, 한국의 근현대사에 걸쳐 이어왔던 것이다. 이 소설은 소설이 쓰인 시기 (즉 박정희 독재정권) 고려한다면 그 독재권력과 피지배자인 시민들 사이의 관계의 우화로 읽힐 수도 있겠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한국 근현대사의 그 한 단면뿐이 아니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언제나 되풀이 되어온 문제, 즉 '지배와 피지배'를 소록도라는 공간을 빌려 이야기 한 것으로 느꼈다.
소설은 소록도의 병원에 조백헌이라는 새 원장이 부임해오면서 시작한다. 새 원장은 "푸른색 유니폼"을 입고, 까무잡잡한 피부에 강한 관서 억양을 쓰는 현역 군인이다. 허리춤에 찬 총도 심상치 않다. 조백헌은 원장다운 패기로 섬에 대한 이미지와 포부를 갖고 등장하는데, 이를 옆에서 끊임 없이 제어하고 비판하는 역할을 맡은 인물이 보건과장 이상욱이다. 그리고 황희백 노인은 소록도의 부침을 몸과 마음으로 경험한 인물로, 소록도 마을의 대표자 역할로 등장한다. 그리고 뒤틀린 광기로 한센병에 집착하고, 일반인을 질투하는 윤해원, 일반인으로 섬에서 봉사를 하며 지내지만 비밀을 갖고 있는 서미연 등 소록도에는 한센병에 걸렸거나, 걸렸다가 치유되었거나, 한센병 부모에게 났지만 미감자라던가, 비밀을 가지고 일반인으로 (혹은 그런 척하며) 살아가는 다양한 인간상들이 나온다. 하지만 소설 내내 주로 조백헌과 이상욱의 대립구도가 주를 이룬다고 생각되고, 그 대립구도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는 과거 원장을 지냈던 주정수 원장과 그 심복 사토다.
섬은 끊임 없이 과거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가는 듯 하다. 사실 주정수 원장과 사토는 실존 인물로서, 소설에서 묘사되는 많은 부분이 사실에 작가의 상상력을 붙인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과거 주정수 원장 하에서 섬 주민들은 그가 건설하려는 '지상 낙원'을 위해 희생했고, 피를 흘렸고, 믿음이나 신의라는 공동체적 가치의 붕괴까지 경험했다. 그리고 주정수와 사토의 지상낙원 프로젝트는 거대한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그 후 여러명의 원장이 교체됬지만, 소록도 사람들은 사실 그 거대한 비극의 그림자 속에서 눈을 감고 입을 닫고 살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던 중에 조백헌이 부임한 것이다.
그가 부임하던 날, 우연치 않게 (나중에 진짜 우연이 아님을 유추할 수 있다) 2명의 한센병 환자가 탈출을 한다. 조백헌 원장에게는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다. 소록도에서 나가려면 외출 허가서를 써서 나가면 되는데, 배를 빌려서 나갈 수 있는 정상 절차도 있고, 섬에 이렇게 모든 것이 마련되어 있는데 굳이 저렇게 위험하게 탈출을 감행할 이유가 뭘까? 하지만 이상욱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이미 알고있다. 그는 조백현 원장의 열띤 질문에 조용히 답한다.
[....] 전 이렇게 알고 있습니다. 섬을 나가래도 나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환자입니다. [...] 하지만 모험을 겪으며 섬을 빠져나가려는 친구들은 이미 그런 환자는 아닙니다. 그들은 환자이기 이전에 인간인 거지요. 환자로서의 생존 양식과 일반의 그것을 구별 짓기에 지쳐버린, 그래서 환자로서의 특수한 처지를 벗어버리고 보다 깊은 생존의 충동에 따라 인간으로서 섬을 나가고자 한 살마들이 이들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 환자와 환자 아닌 사람들이 실상은 같은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말하자면 이 섬에 삶을 의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환자로서의 남다른 처지와 인간으로서의 보편적인 존재 조건들을 두 겹으로 동시에 살아나가고 있는 셈이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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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백헌은 결국 섬 사람들의 철저한 냉담과 무관심에 자극 받아, 자신의 거대한 계획을 풀어놓는다. 바로 소록도를 '문둥이들의 천국'으로 만들겠다는 것. 물론 그의 담대한 계획 주위에는 과거에 주정수가 실패한 '지상낙원'과 거대한 비극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어른거리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일치한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독재자들은, 지도자들은, 장밋빛 미래를 약속한다. 그 판에 박힌 듯이 형식적이고 아름다운 언어의 사용에서 부터, 눈에서 섬광이 나올 듯한 카리스마와 명분과 실리를 다 갖춘 듯이 보이는 멋진 미래에 대한 약속. 소설의 1부에서 독자는 이런 의문을 갖는다. 과연, 조백헌 원장은 과거 주정수 원장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을까? 결국 얼굴만 바뀌고 실패의 역사는 반복되지 않을까?
그리하여, 어쨋든 조백헌 원장은 '축구'라는 오락을 교묘히 이용해 소록도 주민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성공한다. 조백헌 원장가 구상한 '문둥이들의 천국'은 바다를 메워 얻은 농지에 자급자족하여, 육지에 경제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환자들이 행복하게 대대손손 행복하게 살아가는 공간이다. '바다를 메운다'는 그 불가능해 보이는 일에 조백헌 원장은 악착같이 매달리고, 결국 소록도 주민들과 '서약'을 맺음으로서 바다 메우기를 시작한다. 그 서약의 골자는 결국, 과거 '주정수 원장'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목숨을 걸겠다는 것. 그리고 여러가지 난관이 닥친다. 주민들의 노동력 지속적인 동원부터, 옆 마을의 방해와 사주, 이상욱이 시종일관 보여주는 조소어린 침묵, 태풍, 등등..
내가 예상했던 것처럼, 그리고 소설 속 많은 인물들이 (기자 이정태를 포함하여) 예측했듯이 바다를 메우는 것 자체가 실패하진 않았다. 그러나 옆 마을과 관청이 합심하여 개간권을 뺏어가려 시도하고, 정치적 압력으로 결국 조백헌 원장은 좌천되고 만다. 수많은 인명 피해가 났고, 공사는 완성되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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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소설은 이렇게 이어서 부임해오는 원장들의 '천국 만들기' 프로젝트의 실패만을 보여주진 않는다. 3부에서 조백헌 원장은 이상욱이 섬을 탈출하기 전, 그리고 그 후에 쓴 두 통의 편지를 받고 섬으로 이주해 온다. 이상욱의 편지에는 왜 조백헌의 천국이 실패할 수 밖에 없는지, 소록도에 오히려 해로운 것인지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12페이지에 달하는 이상욱의 두번째 편지는 마치 작가 이청준의 자신의 의견을 담은 것인양 생생하고 자명하다.
[....] 도대체 그 원장님의 천국이란 누구를 위해 꾸며지는 누구의 천국입니까? 원장님께서는 물론 쫓기고 학대받아온 이 섬 5천 나환자를 위해 천국을 꾸미고 싶어 하셨고, 지금도 그런 믿음에는 변함이 없으실 줄 압니다. 그러나 원장님께서 이 섬 위에 꾸미고 계신 나환자의 천국이 진정 저들의 천국이 될 수 있으리라고는 원장님 자신도 아직 장담을 하실 수 없는 몇 가지 분명한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원장님의 천국에는 아직도 높은 철조망이 둘러쳐져 있다는 점입니다. 철조망 울타리가 둘러쳐진 천국 -- 그것은 누구에게도 진짜 천국일 수가 없습니다. [....]
원장님께서는 저들에게 그냥 인간의 천국을 지어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문둥이의 천국을 지으려 하고 계십니다. 원장님의 천국 계획은 처음부터 이 나라의 나환자를 한데 모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섬 원생들이 섬을 떠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 원장님께서는 저들을 그냥 한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특수한 조건과 양보 위에 그것을 수락할 수 있는 문둥병 환자로만 이해하려 하심으로써 오히려 저들로 하여금 원장님 자신의 문둥이 천국을 짓게 하고 계신 것입니다.
조백헌 원장은 긴 편지를 읽고, 나병 환자들과 '공동 이해관계'에 놓이기 우해 소록도로 이주한다. 그리고 이제는 원장으로서가 아니라 그냥 개인 조백헌으로 이주해간 그 곳에서 자신의 소박한 첫번째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는 듯 하다. 그건 바로 나병 환자였던 윤해원과 일반인인 서미연의 결혼 주선. 그리고 결혼식 당일, 흥성흥성한 준비 분위기 속에 조백헌 원장은 주례사를 담당한다. 그리고 그 교묘한 시점에 몇 년전에 섬을 탈출했던 이상욱이 섬으로 돌아온다. 결혼식 시간이 다 되도록 조백헌 원장은 자기 주례사에 흠뻑 빠져 주례 연습을 하고, 그 모습을 이상욱이 몰래 지켜보고 있다. 그리고 그런 이상욱을 이정태 기자가 바라보는 스틸컷 같은 장면으로 소설은 막을 내린다. 물론 조백헌 원장은 한참 열띠게 주례 연습 중이다. 이상욱은 여전히 조소가 어린 것인지 만족인지 모를 웃음을 띄고 그를 바라본다.
그렇다면, 과연 이 나병환자군의 윤해원과 일반인 군의 서미연의 결혼으로 조백헌 원장이 바라듯이 섬의 미래는 밝을까? 방둑에 갈라진 공사를 마무리 하지 못한 것처럼, 갈라진 마음을 이어낼 수 있을까? 물론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열린 결말이니까. 하지만 나는 이 결말이 절대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조백헌 원장은 섬에 돌아와서도, 나무뿌리를 불로 지져 모양을 그럴 듯하게 만들어 놓고 그걸 '예술'이라 하며 소일거리 한다. 윤해원과 서미연의 결혼에서도, 서미연이 사실은 미감자 였다는 비밀을 결국 윤해원에게 알리지 않고 쉬쉬하며 결혼을 진행한다. 소설 속에서 주례는 주례 연습으로 끝날 뿐, 실제 결혼식은 이루어 지지 않는다. 결국, 조백헌 원장이 얼마나 호혜와 자비심과 사랑과 공명심과 공동 이해관계로 나환자들을 위한 천국을 꿈꾼다 해도, 그건 지금까지 숱하게 반복되었고, 앞으로도 반복될 실패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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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정책학을 공부한 나에게는 이런 질문도 머리에 맴돈다. 자애로운 독재자 (Benevolent dictator)라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 과거 '아시아의 4마리 용'의 성장개발 쾌거를 연구하며 나왔던 개념이 바로 자애로운 독재자다. <국민에 의해 선출되진 않았지만, 그 독재자가 진짜로 국가와 국민을 위하여 정책을 피고, 실행해 나간다면 성공을 이룰 수 있다...>는 요지다. 실제로 개발독재를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혹할 논리이기도 하고, 실제로 자주 사용하는 의식 흐름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당신들의 천국'에서 이 '자애로운 독재자' 개념의 어불성설, 즉 이미 단어 속에 내포된 Oxymoron, 형용 모순을 발견한다.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의도로 선출하지 않은, 외부에서 온 지도자가 아무리 호혜와 시혜를 베풀어 그 섬을 위해 힘쓰고 애쓴다 해도, 그건 결국 실패를 씨앗에 내포한 또 다른 실패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 이청준의 목소리로 대답을 대신한다.
문제는 명분이 아니라 그것을 갖게 되는 과정이었다. 명분이 과정을 속이지 말아야 한다. 명분이 제물을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 천국이 무엇인가. 천국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 속에서 마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여야 했다. 스스로 구하고, 즐겁게 봉사하며, 그 천국을 위한 봉사를 후회하지 말아야 진짜 천국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원장의 계획은 어떤가. 명분은 물론 나무랄 데가 없었다. 하지만 섬사람들이 진심으로 그 명분에 따를 수 있을까. 따르려 한다 해도 손발이 성하지 않은 그들이 끝끝내 그 명분을 감당하고 견뎌낼 수 있을까. 언젠가는 명분이 그들을 속인 결과가 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가 있을까. 게다가 큰 명분의 뒤에는 알게 모르게 늘 누군가의 동상이 그림자를 드리우게 마련이었다. 원장에게 동상의 꿈이 숨겨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증명될 수 없는 지금 그를 온통 신용해버릴 수가 있을까. 명분만으로 그를 믿을 수가 있을까.
끊임없이 과거 독재자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사회, 그 독재자의 동상을 세우려는 이들과 그 동상을 부정하려는 이들이 끝없이 대치하는 사회. 그게 바로 현재 2015년의 우리 모습이다. 이청준의 '우리들의 천국'은 우리의 근현대사와 현재를 미리 알고 교묘하게 짜낸 우화같아서, 너무 잘 들어맞는 한 편의 서사같아서, 읽는 내내 감탄했다. 이청준이라는 작가가 현실 소재에서 인물들과 공간을 가져와서, 다시 캐릭터를 창조하고, 사건을 짜넣고, 세계관을 성립한 그 탁월함에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다. 길이길이 읽히고 회자될 '고전'의 기준을 100% 충족하는 작품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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