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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속을 걷다

생의 이면 - 이승우

by 주말의늦잠 2015. 4. 4.



생의 이면

저자
이승우 지음
출판사
문이당 | 2005-06-1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이 책은 나의 숨결과 혼이 가장 진하게 배어 있는 작품이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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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우 작가님의 소설은 처음이었고, 이렇게 자의식이 강한 주인공이 등장한 소설은 오랜만이었다. 소설책을 펼쳐, '개정판에 부쳐'와 '작가의 말'을 읽고 본격적인 소설의 첫 장으로 넘어가는 문장이 굉장히 낯설었다."청탁을 해온 편집자에게 이미 밝힌 바대로, 나는 이 글의 필자로 적합하지 않다. 나더러 박부길 씨를 이야기하라니....." 마치 서문이나 작가의 말의 연속상인 듯, 그렇게 낯설게 소설은 시작한다. 


  소설의 주된 화자는 박부길이라는 작가의 삶의 이력을 소설과 연관해 추적해보라,는 주제로 글 청탁을 받은 또 다른 작가이다. 그는 소설 속에서 박부길을 예리하게 관찰하고, 그의 작품을 통째로 혹은 부분적으로 인용하고, 그리고 그에 대한 자신의 인상이나 판단을 내리고 있다. 그런데 소설을 다 읽고 주제의식이나 내용도 그렇지만, 소설의 구조가 참 교묘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박부길의 '촌놈'시절, 불우한 초년의 운명, 일찍 인생의 맛을 알아버린 어른아이같은 자의식의 표출. '데미안'의 에바부인에 대한 싱클레어의 숭고한 연모를 모델로 한 듯한 (소설에 직접 언급된다) 연상 여인과의 사랑. 그리고 신학교에의 입학과 '낯익은 결말' 까지. 이 소설가가 박부길의 소설을 통해 짚어나가는 박부길의 인생이, 이 '생의 이면'의 작가인 이승우 작가의 것과 닮아있지는 않은가.. 그런 생각이 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이중의 층위를 가진다. '생의 이면'을 쓴 실존 작가 이승우의 생, 그리고 '생의 이면' 소설 내부의 실제적인 주인공 '작가 박부길'의 생. 신학을 통해 아름다움에 다가가고자 했으나 작가가 된 박부길의 생. 그리고 신학대학 및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는 작가 이승우의 생. 음, 이건 초보 독자도 능히 알아챌 만한 소설의 작가와 소설 속 인물의 상동성이 아닌가. 그렇다면, 박부길의 삶과 이력을 더듬어 가는 이 화자인 작가의 목소리 역시 작가 이승우의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소설은 겉으로 드러난 이중의 층위 사이에 또 얇은 층위를 품고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독자들은 쉽게 생각한다.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는 상당 부분 작가가 겪은 일이거나, 생각한 것이겠지. 상상력을 빌려 취사선택 되거나 수정되긴 하겠지만, 소설 자체가 소설의 '작가'의 목소리를 대변한다거나, 그 작가와 동일시 되는 것은 흔한 일이다. 물론 그건 독자들의 착각이다. 혹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소리다. 소설 속 박부길은 <지상의 양식>에서 이야기한다.




 자, 내가 취사선택되고 검열된 기억 속의 과거를 들고 나온다고 하자. 그것들은 거짓이거나 꾸며진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그것들은 내 자아의 어느 층에선가 충동질을 받고 튀어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그 층에서는 진실일 것이다. 그러나 어떤 하나의 층의 진실이 모든 층의 진실을 대변할 수 있을까. 대답을 하기 위해서 질문을 던진다. 그 여러 개의 층들은 왜 있는가. 자아를 형성하고 있는 그 수많은 층들인 맡은 역은 무엇인가. 대답은 너무 뻔해서 싱겁다. 그것은 왜곡하기 위해서이다. 감추기 위해서이다. 19의 층은 18의 층을 감춘다. 20의 층은 19의 층을 왜곡한다. 그것은 서로를 감추고 왜곡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복잡한 기계이다. [...]


 왜곡된 진실이라 하더라도 진실일 수 있을까? 물속에 비친 찌그러진 달, 색안경을 쓰고 보는 푸른 달, 그리고 암스트롱이 찍어 보낸 필름 속의 달, 그것들을 달이 아니면 무어라고 말하 것인가. 해라고 말할 것인가, 꽃이라고 말할 것인가. 그것들은 달이 아니지만 달이다. 그런 것이 있을 수가 있다. 진실이 아니지만 진실인 것. 우리의 검열받은 기억 속의 과거가 그러하다. 그것들은 한낱 인상에 불과하지만, 그 인상을 조작된 것이라고 몰아붙일 수는 없다.




  <지상의 양식>은 미발표된 작품이고, 화자는 <지상의 양식>이 '그 당시를 회고한 고백적인 소설'이라 미발표 된 것으로 간주한다. 박부길의 모든 소설에 박부길 자신의 자서전 적인 사실들이나 고백적인 회고가 녹아들어 있지만, <지상의 양식>은 전체가 '생의 이면'의 한 장으로 통째로 삽입되었을 정도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렇다면, <지상의 양식>이 자서전이 아니라 소설인 이유는 무엇인가? 한 작가가 작품의 자신의 생애와 이력을 고스란히 녹여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고 할 때, 그 작품이 '자서전'이 아니라 '자서전 적인 소설' 혹은 '사소설'이라 분류되는 근거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러나 실제로 한 인간으로서 밥벌이의 운명을 타고난 작가가 자신의 녹여넣지 않는 소설을 쓸 수 있단 말인가? 모든 역사는 씌여진다. 모든 이야기는 씌여진다. 그러므로 쓰는 주체가 있다. 그 주체의 시각과 편집, 수정이 가해지지 않는 '사실'이란 없다. 이 주제에 대하여 소설의 화자인 작가는 이야기한다.


 

[....] 사실을 썼다고 하더라도 소설가가 쓴 것은 결국 소설이다. 백 퍼센트 증류 상태의 사실이란 없다. 더구나 소설 속으로 들어오면 더욱 없다. 그런데도 사실, 또는 사실이라고 말해지는 것들을 우리를 홀린다. 사실에 대한 우리의 신봉은 소설을 작가의 삶과 겹쳐 읽게 한다. 지금의 나 또한 예외가 아니다. 나는 박부길의 소설을 박부길의 삶 위에 포개려고 한다. [...] 그렇다면 그의 소설을 그의 삶 위에 포개려는 시도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 일이 가능하기나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하고, 그렇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선택과 배제, 그리고 굴절과 왜곡은 그의 선택과 배제이고 그의 굴절과 왜곡이다. 그가 선택하고 배제한다. 그가 굴절하고 왜곡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품에 나타난 사실은 그가 선택하고 배제하고 그가 굴절하고 왜곡한 사실이다. 우리에게 증류 상태의 '그의' 사실을 알아야 할 필요나 이유가 있을까? [...]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그러니까 우리가 알아야 할 필요와 이유가 있는 사실은 그가 선택하고 배제한, 그가 굴절하고 왜곡한 그의 사실이다. 그 사실만이 의미 있는 사실이다. [...] 




  결국 한 작가가 쓰는 소설은 그 자체로 작가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연쇄살인마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의 작가가 연쇄살인의 충동으로 내달린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이라고 간주되는 것에 목을 매고 있음을 방증한다. 작가는 소설 속 화자의 목소리를 빌리는 것이지, 작가 주체를 소설 속에 몽땅 내던지는 것은 아니다. 나는 지금까지 소설을 읽으며, 과연 소설 속에 작가의 모습이 얼마나 투영되어 있을까, 하는 의문을 품은 게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생의 이면'이 나에게 지금으로선 명쾌한 답을 준다. 작가의 모습이 '얼마나' 투영 되어있는지를 따지는 것은 결국 '사실'이라고 말해지는 것 (객관적 의미에서 '사실'은 있을 수 없으므로)에 천착하는 일이다. 별 가치가 없는 일이라는 요지다. 



  따라서, 소설 속에서 우리가 발견해야 하는 것은, 파편들 속에 감추어진 작가의 내밀한 음성이지 파편들을 꿰맞춘 사실의 복원이 아니다. 그러나 독자는 책 밖에 있고, 작가가 쓴 글들은 책 속에 갇혀있다. 독자는 작가를 만나기 위해 책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독자는 한 작가가 써놓은 소설을 읽음으로써, 그 각각의 소설들에 드러나 있거나 감춰져 있는 파편들을 찾아내어 자기의 경험과 상상력에 의존하여 조합함으로써 나름대로 한 작가를 만든다. 그런 뜻에서 소설이 없으면 삶도 없다. 


  이 짧은 문단이 내가 이 소설에서 건져올린 싱싱한 나의 답이다. 작가 이승우가 소설 속 화자의 입을 빌려 이야기 했지만, 내가 이 구절에 반응했음으로 이 문단은 나의 답이다. 나는 소설 속의 화자가, 작가로서의 이승우와 박부길이라는 작중 소설가의 소설을 읽는 독자의 한 사람 그 중간 어디엔가에 자리를 잡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나는 독자로서 그 화자의 목소리를 따라, 박부길의 삶과 이력을 흥미롭게 읽었지만, 또한 그 소설의 숨겨진 작가의 목소리를 찾으려 무의식 중에 노력하고 있었던 것 같다. '생의 이면'. 드러나고 재구성되고 취사선택 된 '생'의 기록들에 대하여, 그 '이면'을 읽는 행위. 그것만큼 매력적인 일은 이 세상에 그리 많지 않은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