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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속을 걷다

잘라라, 그 기도하는 손을 - 사사키 아타루

by 주말의늦잠 2014. 6. 26.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저자
사사키 아타루 지음
출판사
자음과모음 | 2012-05-18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감히 일본의 ‘니체’라 부를 만한 떠오르는 신예 사상가‘사사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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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다는 것, 텍스트를 쓰고, 읽고 다시 쓴다는 것에 대한 철학적 사유. 꼬장꼬장한 일본 철학자의 놀랍도록 명백한 사유의 길이, 역사적, 종교적 통찰을 바탕으로 펼쳐진다. 그는 '다양한 것을 버리기 시작했다'로 책을 시작한다. 다양한 정보를 차단하기로 했다. 미술관을 가지 않기 시작했고, 영화보는 것도 그만두었으며, 음악도 듣지 않고, 티비도 보지 않고, 잡지도 스포츠도 보지 않고, 담배도 끊었다. 


왜냐하면, 정보를 모은 다는 것은 명령을 모은다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식이나 정보라는게 이토록 사람들을 병들게 하고 쇠약하게 하는 것인가, 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대학의 교양학부 커리큘럼은 가장 빈곤한 의미에서의 '비평가' 밖에 낳지 못하는 시스템이 되어 있었고 모든 것을 축소 재생산하며 희희낙락하며 쇠약해져 가는 그런 장소가 되어있었다고 소회한다.



질 들뢰즈의 말, "타락한 정보가 있는게 아니라 정보 자체가 타락한 것이다'. 하이데거 역시 '정보란 명령이라는 의미'라고 말했다. 정보를 모은다는 것은 명령을 모으는 것, 언제나 긴장한 채 명령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명령에만 따르면 자신이 옳다고 믿을 수 있으니까, 자신이 틀리지 않다고 믿을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는 어리석고 우매하더라도 '그런 명령' 같은 것을 모두 거절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읽었다'. 하얀 종이의 표면에 비치는 광기와 그것을 읽지 않겠다고 하는 자신의 방어기제에 투철하게 저항하며 끈기 있게, 반복적으로, 치열하게 읽었다.


먼저 '읽는 다는 것이' 왜 광기에 접촉하는 일인지, 읽고나서 어떻게 '아무 것도 안 할' 수가 있고 또 '어떻게 무언가를 할 수' 있는지 그 놀라운 일에 대해 간접 경험을 하는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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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에 '문학'이라는 것은, 아주 좁은 개념으로 축소되어 있다. 애초에 문학이라는 것은 쓰는 것, 쓰는 방법 그리고 읽고 쓰는 데 필요한 문학적 학식 일반을 의미했다. 즉, 어떤 문제에 대해 공간된 저작의 총체를 의미했다. 현재 통용되고 있는 의미로의 '문학', 즉 아름답거나 오락을 위한 언어예술 작품으로서의 '문학'이라는 의미는 18세기가 되어서야 나타난다.


철학자 존 로크와 데이비드 흄, 그리고 물리학자 아이작 뉴턴은 당시 '문학'을 쓰는 사람들, 즉 '문학자' 였다. 그들은 문헌이나 자연법칙을 '읽고', 책을 쓰는 그런 사람들이었으니까. 과학은 물론이고 철학, 수필, 역사학 그리고 경제학을 비롯한 사회과학이 문학과 구별된 것은 이 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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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용례를 더 거슬러 올라간다면, 문학이란 '성전을 읽고 성전을 편찬하고 그것에 대한 주석을, 신학서를 쓰는 기법'이라고 말한다. 16세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이미 부패하여 거의 기능부전에 빠진 상태였다. 고위 성직자 자리는 '기득권'이 되어 있었고, 교회직에 취임하면 영지 또는 재산에서 수익을 얻을 수 있어, 이를 '성직록'이라고 불렀다. 수도원 제도 역시 귀족들이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는, 패셔너블한 사교장으로 전락했다. 교회의 성직자 위계제도는 관료제의 기원이고, 그 당시 교회는 그 자체가 정부이자 최종 권위를 가진 곳이었으므로, 이것은 바로 '정치와 관료제의 부패'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리고 '종교 대혁명'의 시발점, 루터는 무엇을 했는가. 그는 읽었다. '성서'를 읽었다. 그는 알았다. 이 세계에는, 이 세계의 질서에는 아무런 근거도 없다는 것을. 성서에는 교황이 높은 사람이라는 이야기는 써있지도 않았고, 추기경을, 대주교 자리를, 주교 자리를 마련하라는 말도 없었다. 단지 '십계명을 지키라'라고 쓰여있었을 뿐. 루터는 이상할 정도로 - 그리고 이상해질 정도로 - 철저하게 성서를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그는 정말 미쳐갔을까? 책을 읽고 있던 그가 미친 것일까, 아니면 그 세계 자체가 미친 것일까? 


루터는 읽고 썼다. 그는 번역하고 설교했고, 노래하고 논쟁했다. 그는 당시 민중의 졸렬한 언어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던 독일어로 성서를 번역했고, 대량의 저작을 써냈다. 그리고 독일 '문학'의 창시자가 되었다. 그리고 종교 대혁명이 일어났다.


중세 이래 유럽의 법과 제도는 그리스도교에 준거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자 루터의 혁명의 법의 혁명이다. 그는 모든 법을 '구약성서'에 있는 십계명에 명시적으로 준거하게 함으로서 근거를 부여하려고 했다. 그리고 '양심'을 강조했다. 칸트는 '법의 적용 방법을 정한 법은 없다'라고 했다. 법이 있으면 안심이라고 생각했는데, 법이라는 것의 본성에 따르면 법의 운용 방법 자체를 법에 적어놓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법을 어떻게 적용할지, 그때의 기준이 되는 것은 '양심'이다. 서구의 현행법이 루터파에 가장 많이 빚지고 있는 부분이다. 법을 구체적인 사례에 따라 '공정하게' 적용한다는 것은 재판관의 '양심적인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혁명은 절대적인 자유를 요구하며 법을 분쇄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법을 '우리가 법이라 부르는 것'을 다시 쓰는 것이다. 혁명의 본질은 폭력이 아니다. 경제적 이익도 아니고 권력의 탈취도 아니다. 텍스트의 변혁이야말로 혁명의 본질이다. '문학'이야말로 혁명의 근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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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하메드의 혁명.


그는 이슬람을 청초한 예언자이다. 그는 고아였다. 그리고 스물 다섯살 때 당시 마흔 살이었던 여성 부호 하디자와 결혼한다. 그 사이에서 낳은 아들은 다 죽고, 네 명의 딸만 거느리게 된다. 그는 마흔 살 깊은 고민과 불안에 사로잡혀 동굴에 들어가 명상에 든다. 그리고 그 곳에서 대천사 지브릴 (가브리엘)과 만나게 된다. 대천사가 전한 신의 계시, 전 이슬람 세계를 정초하는 최초의 계시는 '읽어라 iqra'라는 것이다. 


'읽어라. 창조주이신 주의 이름으로.

아주 작은 응혈에서 사람을 만드셨다.

읽어라. 너의 주는 더없이 고마우신 분이라.

붒을 드는 법을 가르쳐 주신다.

사람에게 미지의 것을 가르쳐 주신다.'


이슬람의 성전 '코란 (qur'an)' 역시 '읽기'라는 의미의 말에서 온 것이다.


모하메드는 문맹이었다. 그는 대천사 지브릴에 의해 신의 말을 전해 받았다. '코란'에는 인간이 읽을 수 없는 신의 말로 쓰인 원본이 있다고 전한다. 그 원본을 이슬람에서는 '책의 어머니'라고 한다. 따라서 '코란'은 책의 어머니의 사본이 된다. 모하메드는 '신은 낳지 않는다. 신은 태어나지 않는다'라며 생식하는 아버지로서의 신을 부정한다. 모하메드는 '나는 너희들 누구의 아버지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책의 어머니'에 도달하는 것을 추구했던 것이다. 훗날 전승에 따르면, 대천사 지브릴은 모하메드의 목구멍을 찢어 심장을 꺼내 씻어 신체에 되돌려 놓는다. 그리고 그제서야 모하메드의 마음은 신앙과 지혜로 가득찼다. 마음이 정화된 모하메드는 천마를 타고 한달음에 천리를 날았다고 한다.


목구멍을 찢고 심장을 꺼내 씻었다. 그러나 천리를 갔다. --- 읽는다는 것인 이 정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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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리주의자들. '소위' 원리주의자들. 그들은 사실 '무원리주의'자들이다. 자신이 의거하고 있다는 텍스트에 전혀 근거를 두고 있지 않으며, 사실 제대로 읽지도 않았을 것이다. 지하드를 자처하는 자들, 그들은 지하드를 선언하기 위한 합법적 권한에 의해 절차를 밟지도 않고, 이슬람 법을 배운 적도 없는 자들이다.


종말론을 운운하는 자들도 그렇다. 예수는 마르코의 복음서 13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그때가 언제 올는지 모르니 조심해서 항상 깨어있으라'. 성서에 반하는 자를 악마라고 부른다면, 종말의 시한을 정하는 자들이야 말로 악마가 된다.


자신이 말하는 것과 성전이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은, 성전이나 책에 무엇이 쓰여있건 자신이 멋대로 언제 종말이 올지 지정할 수 있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근거는 자신이니까. 그러므로 자신과 세계를 구분되어야 하고, 책을 타자화하는 위대한 싸움은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 병들어 있는 것이다.  - 옴진리교가 그렇고 나치가 그랬다. 아무것도 낳지 않고, 뒤에 아무것도 남기지도 않는 그저 무익한 대량의 죽음을 가져오는 병든 생각이다.


그렇게 현대사상은 그 후 압도적으로 병든 방향으로 향하고 만다. 누구나 '역사의 종말'이니 '인간의 역사는 끝나고 이미 종말이 찾아왔으며..' 운운 쓸데없는 잡담을 늘어놓을 뿐. 그리고 '현실'에 대한 '현재'에 대한 굴종을 선전하며 돌아다닌다. 이게 뭔가? 이런 것이 사상이라는 이름에 걸맞기나 한 것인가? 이 대체 얼마나 비열한 굴종인가? 이런 건 비극도 희극도 아닌, 그저 가소로운 것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