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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속을 걷다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 에밀 시오랑

by 주말의늦잠 2015. 6. 6.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저자
에밀 시오랑 지음
출판사
챕터하우스 | 2013-05-27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육신이 없는 정신이란 대체 무엇인가? 가장 완벽하고 우아한 문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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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의 철학자라는 별명을 가진 에밀 시오랑의 에세이집.

한국어 제목은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로

폐허와 무의미로 점철된 풍경에 아스라히 떠오르는 태양을 연상케 한다.

일말의 긍정이 실려 있는 제목이랄까..

그런데 원제는 'Sur les cimes du désespoir d'Emil Cioran'. 즉, '절망의 꼭대기에서'.


사실 이 책을 산 것은 재작년 이었다. 2013년 중순정도.

그 당시 한국에 잠깐 들어왔다가 다시 아프리카로 나가야 했기에,

여러가지 재미있을 것 같은 책을 싸갔다. 

결론적으로, 아프리카 적도지방 가나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읽을 책은 아니었다.

그래서 이제 서울 생활의 침착함 속에서 다시 읽기 시작했다.


필요 없을 정도로 무의미나 인간의 덧없음에 집착하는가 하면,

모든 문장이 에밀 시오랑의 마음 속의 불꽃이 옮겨 붙어있는 것처럼 탄탄하고, 긴장으로 가득하다.

우리 시대를 살았다면 그는 분명 정신병 질환 판정을 받았을 것이다.

극도의 긴장과 절망, 열정과 에너지, 절망과 無, 정신, 정신, 정신...


-


에세이를 읽으며 전혀 공감가지 못하는 내용들이 있는가 하면, (내 정신이 우둔한건가-_-;)

예리하게 빛나는 정신 속의 섬광같은 구절들을 발견하기도 한다.


때와 장소에 어울리는 책이라는 것이 있기 마련인데,

에밀 시오랑의 책은 '바닥을 치고 싶을 때' 제격이다.

힘들고, 세상 만사가 병신같을 때 읽으면, 공감하게 되면서...

나도 모르게 그 폐허와 비극의 언어에서 이상한 위안을 얻는다.

물론 내가 그의 글을 읽고 위안을 받는 다면, 그의 의도에 정확히 빗나가는 일이다.


그러나 빗나가든, 적중하든 큰 차이가 없다면 뭣하러 신경을 쓸 것인가?

그가 희구하는 만큼이나, 나도 이 세상이나 인간들의 행태가 별볼일 없다고 느끼는 것을.

행복과 선과 신을 찬미한 후, 돈 봉투를 집어들고 밥먹으러 가는 뒷모습만큼이나 역겹고 토나오는 장면은 없다.




p.39

  내가 내 자신을 괴롭히든 고통스러워하든 혹은 뭔가를 생가하든 무슨 상관인가? 나라는 존재는 몹시 애석하게도 몇 사람의 평온한 삶을 흔들어놓거나, 더욱 애석하게도 다른 몇사람의 무의식 상태를 방해하기만 할 뿐이다. 나는 나의 비극이 역사에서 가장 중대한 - 제국의 붕괴나 광산 맨 밑바닥 낙반사고보다 더 심각한 - 것처럼 느끼면서도, 은연중에 나 자신이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세상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굳게 믿지만, 또한 동시의 나의 존재만이 유일한 현실이라고 느낀다. 더 나아가 만일 세상과 나 중에서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기꺼이 세상 모든 빛과 법칙을 없애버리고 홀로 허공을 떠돌 것이다.


p.84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무엇이 허락되고 무엇이 허락되지 않는지 나는 모른다. 찬사를 보내지도 비난을 퍼붓지도 못한다. 세상에는 확실한 기준도 원칙도 없다. 다만 몇몇 사람들이 아직도 이론적 지식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 지식이 상대적이라는 것에 크게 괘념치 않는다. 세상은 탐구할 가치가 없다. [....]


 지금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으며 어떤 희망도 갖고 있지 않다. 살아가는 즐거움들이 내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과거에 대한 감각도 미래에 대한 감각도 없고, 현재가 독약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내 자신이 절망에 빠진 사람인지도 알 수 없다. 희망이 없다는 것이 반드시 절망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니까. 어떤 수식어로도 나를 표현할 수 없다. 나는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 내 주위에서 모든 것이 깨어나는 시간에 나는 모든 것을 잃는다! 나는 모든 것으로부터 얼마나 소외되어 있는가!


p. 87  

 내 뒤에 태어날 사람들을 위해 나는 여기서 선언한다. 이 지상에서 믿을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구원은 망각 속에 있다고. 모든 것을 잊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나 자신도 잊고, 세상을 잊고 싶다. 진정한 고백이란 눈물로만 쓰는 것이다. 그러나 내 눈물은 세상을 잠기게 할 것이다. 내 안에 있는 불은 세상을 태워버릴 것이다. 기댈 곳도 필요없고, 격려도 동정도 필요없다. 내가 아무리 타락했을지라도 나 자신은 강인하고 냉정하고 사납다고 느낀다. 나는 희망없이 살고 있는 유일한 인간이다. 강렬한 영웅적 용기, 그 절정과 역설이 거기에 있다 . 미친 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