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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속을 걷다

희박한 공기 속으로 - 존 크라카우어

by 주말의늦잠 2014. 8. 14.



희박한 공기 속으로

저자
존 크라카우어 지음
출판사
황금가지 | 2007-06-12 출간
카테고리
취미/스포츠
책소개
한국 에베레스트 등정 30주년 산악인의 필독서 [희박한 공기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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퓰리처 상을 받은, '산악문학' 분야에서는 아주 유명한 책인데

나는 들어보지도 못 했고, 2014년이 되어서야 읽어보게 되었다.

이 책은 물론 산악/스포츠 문학으로 분류되지만, 

읽어보면 '증언문학' 혹은 아주 자세한 개인의 '일기'로도 읽힌다.


존 크라카우어는 본래 아주 유명한 잡지사인 <아웃사이드>에 일하던 기자였는데,

어느 날 가이드가 딸린 등반대의 일원으로 에베레스트에 오르게 되고 그에 관해 글을 쓰게 된다.

로브 홀이라는 가이드가 이끄는 여덟 명의 대원 중 하나로 에베레스트 등반에는

성공하게 되나, 아주 혹독한 대가를 치루게 된다.

그 팀이 정상이 오르던 날 총 4팀의 등반대에서 9명이 사망하게 되고,

그 후 3명이 추가로 더 사망하는 큰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존 크라카우어는 유명한 가이드들을 포함한 12명이 불의의 사고로 죽는

재난에서 살아난 생존자 중 한 명이 된 것이다.

그는 약속대로 <아웃사이드>에 글을 기고하게 되고, 그 글로 인해

유가족들이나 다른 생존자들에게 의도치 않은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리고 그 또한 지독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된다.

그 트라우마.. 감정적 속죄를 하는 방식으로 그는 이 책을 썼다.

해발 0m에서 에베레스트 정상까지의 여정을 아주 자세히 서술해낸다.

그의 서술 속에서 인물들은 앞으로 일어날 사건도 모른 채,

지구의 지붕을 향한 여정을 들뜨고, 행복하고, 힘들고, 지치게 계속해나간다.


-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두 가지 관점에서 생각을 해 보게 되었다.


첫번째, 큰 인명피해로 이르는 '재난', '사건', '사고'는 어떻게 일어나는 것이고, 

그에 대한 책임은 어디에 있는가.


에베레스트 정상까지 앞서거니 뒤서거니, 오르던 여러 팀들..

그 팀 중에는 백만장자도 있고, 저명한 잡지의 기자도 있다.

그리고 천문학적 액수의 에베레스트 등반비와 세계의 지붕을 오른다는 그 값진 경험이 

상업적으로 섞일 수 밖에 없는 상황.

그러므로, 각 팀을 이끄는 리더들은 안전하게 모든 대원을 정상까지 이끌고,

다시 내려오게 만드는 중추적인 책임감과 역할을 맡게 된다.


연쇄적인 상황판단 오류와 산소가 희박해진 상태에서의 판단 능력 저하.

콩코드 오류, 이미 큰 돈이나 노력을 지불한 것은 손해나 위험을 무릅쓰고도 

끝까지 밀고나가려는 특성을 콩코드 오류라 한다.

이렇게 아주 사소한 연쇄적 상황과 에피소드들이 큰 재난으로 이어졌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나, 이렇게 살아남은 자들이 말을 할 때

정말 알고 싶은 것은, 왜 그들은 죽어갔으며 그 책임은 누가 지는 것인가?

답을 찾을 수 있는가? 존 크라카우어는 답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 희박함에도

이렇게 심한 충격과 혼돈의 기억을 더듬어 책을 써냈다.


나는 그 등반으로 인해 심한 충격을 받아 그에 관한 기사를 쓰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 나는 혼돈스런 감정들의 안개 속을 더듬으면서 그곳에서 일어난 일들을 명확히 파악하려 애썼으며 내 동료들이 죽게 된 정황을 규명하는 일에 강박적으로 매달렸다. [...] 내 입장에서는 그 비극을 제대로 다루기에는 (잡지의) 지면이 너무 좁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 등반으로 인해 내 삶 전체가 뿌리채 뒤흔들렸으므로 내게는 그 사건들을 지면의 제약을 받지 않고 면밀하게 추적하고 기록하는 일이 더없이 중요했다. 이 책은 그런 강박증의 결실이다.



두번째 관점 역시 위와 연결된 맥락이다. 

생존자로서, 살아 남은 자로서, 도덕적 죄의식, 자책감을 속죄하는 방식

그 방식으로서 존 크라카우어는 '글을 썼다'. 

글을 씀으로서, 강박적으로 그 사건의 아주 작은 조각까지 면밀하게 기록하려 애씀으로서,

그렇게 속죄 하려 노력한 것이다.


그러나 속죄라는 것이 당최 가능이나 한 것인가?

나는, 우리 모두는, 세월호 참사 앞에서 죄의식에 빠진 경험이 있을 것이다.

적어도 이해하고 공감하는 능력이 있는 일반적 도덕의식이 있는 한국인이라면, 인간이라면,

그런 대참사 앞에서 어떻게 자책하지 않고, 살아남은 죄의식을 지울 수 있겠는가?

세월호 앞에서,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학살' 앞에서, 

전쟁으로 죽어간 생명들 앞에서, 인간 집단 광기 속에서 살해되고 고통받았던 그 기억 앞에서,


누가 어떤 방식으로 속죄할 수 있단 말인가?


속죄는 자기 기만일 뿐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속죄는 자기 위안일 뿐이다. 살해 당한 자는 말이 없다.


그냥 속죄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그 노력하는 움직임으로서 나온 그의 '책'은 그러므로 숭고하다.

존 크라카우어는 속죄하지 못 했으나, (앞으로도 속죄하지 못 할 것이나)

속죄하려는 그 인고의 노력으로 동료 인간으로서의 '숭고미'를 보여주었다.



나, 개인 일반으로서의, 나는 어떤 방식으로 속죄할 수 있는가, 를 생각해 본다.



- 8월,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