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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적인 생각

유죄추정의 원칙

by 주말의늦잠 2015. 4. 19.




  다들 봄기운에 신이 난 표정이었다. 봄 나들이를 가는 커플들의 깍지낀 두 손에도, 살랑거리는 치맛결에도, 사람들의 표정과 길거리에도 긴 겨울 끝에 드디어 찾아온 봄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찬 듯 했다. 그런데 4월은 기대를 하게 하다가도, 새삼 잔인한 달이라는 확증을 굳힌다. 4월 16일에도 비가 왔고, 오늘 19일도 비가 왔다. 안 그래도 요즘 인간 사회라는 것에 염증을 느끼던 차였다. 뉴스를 봐도, 읽을 거리를 눈 앞에 두고서도, 피하고만 싶다. 나의 뇌가 뉴스를 보고, 듣고, 읽고, 받아들이는 행위를 거부하던 차였다. 이 염증이 이 사회에 대한 것인지, 인간들의 행태에 대한 것인지, 혹은... 나의 무능력에 대한 것인지 궁금하던 차였다.


  그러던 차에 신형철 평론가님의 '정확한 사랑의 실험'을 읽게 되었다. 안 그래도 문학동네 팟캐스트를 들으며 그의 책을 꼭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그가 더 정확해지려고 하는 시도가 고스란히 보이는 문장들과 문단에서 위로를 받았다. 그는 문학이 경계를 흐리게 하는 것이라 말한다. 너는 악해. 나는 착해. 그러니까 너 잘못이야. 너 때문이야. 나와 너, 흑과 백, 선과 악. 이러한 우리 안의 매카시즘. 색깔론과 흑백논리가 없으면 기본 논증도 할줄 모르는 사람들이 바로 한국의 정치인들 아닌가. 그 정치판의 색깔논리를 그렇게도 잘 흡수하는 것이 우리나라 사람들 아니던가. 그래서 나도 어느새 이분법의 논증구조를 내 머릿속으로 옮겨놓고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저 사람은 저쪽사람, 기득권층, 우파, 수구, 기회주의자, 꼴통, 미친놈, 병신같은 가치관. 나는 이쪽사람, 대항하는 자, 권리를 수호하는 자, 온건한 논리주의자, 신념주의자, 지식인, 우월한 가치관. 대놓고 말하지 않아도 나는 이런 이분법의 논증구조로 사람들과 사회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최근 내가 그렇게도 불평 불만이 많아진 것인지도.


  그런데, 신형철은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서 마치 나에게 톡 쏘는 듯한 한 마디로 나를 무장해제시켜 버렸다. '더 헌트' 영화를 평하며 그는 말한다.


  진실에 도달하는 일이 언제나 가능하지는 않지만 불가능하지도 않다. 불가능하지 않으므로, 필사적으로 무죄추정의 원칙을 고수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나는 다시 서사의 힘에 대해 생각한다. 좋은 서사는 언제나 한 인간을 이해하게 만들고, 모든 진정한 이해는 성급한 유죄추정의 원칙을 부끄럽게 만든다. [...] 그리고 깨닫게 될 것이다.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인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들이다,라.. 이 말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결론이 아니다. 즉, 인간이 선천적으로 선하다, 악하다를 논증하며 나온 결론이 아니다. 이 말은 우리 모두가 '합리적인 부조리'를 만들어 내는 당사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다시 풀어낸다면, 고귀한 도덕주의자도, 실패한 권력의 하수인도, 일상생활을 사는 생활인도, 학자도, 은행가도, 서점 주인도, 모두가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자기가 가해자인지도 모르고, 생을 마칠지도 모를 일이다.


  당신이 괴물을 보았다면, 그 괴물이 당신과 아무 관계 없는 '악의 무리'가 갑자기 나타나서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마라. 당신도 그 괴물을 만드는 데 동참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괴물이 우리 곁에 있을 리가 없다. 내가 부조리를 보았다면, 그 부조리는 나와 관계 없는 '권력에 눈이 먼 세력'이 갑자기 나타나서 부조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 생각하면 안 된다. 나도 그 부조리를 만드는 데 동참한 것이다. 카프카적인 세계에서 부조리란, 개인에게 도덕심의 각성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모양이다. 나는 이 끝없는 '유죄추정의 원칙'의 습관을 버리겠다고 생각한다.



- 4월, 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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