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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속을 걷다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 필립 로스

by 주말의늦잠 2015. 7. 29.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저자
필립 로스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3-04-3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도덕이 대중의 오락으로 떨어진 시대 '레드 콤플렉스'와 '매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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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는 분명 강렬한 제목의 책임이 분명하다.


  요즘 날씨도 덥고, 시절도 하수상하여.. 450페이지 넘는 무거워보이는 소설을 집게 해준 것은 구할이 '필립 로스'라는 작가 덕분이다. 소설의 화자인 '네이선 주커먼'은 사실 필립 로스의 소설의 화자로 자주 등장한다. 주커먼이라는 화자가 미국의 목가,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휴먼스테인, 가장 최근의 네메시스까지 거의 10권의 소설에 등장하기 때문에, 보통 '주커먼 시리즈'라고 부른다.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는 1998년 작으로 한국에서는 2010년에 처음 번역되고, 최근 2013년 문학동네에서 다시 번역되어 나왔다. 이 소설은 화자 주커먼이 학창시절 영어 선생님과 여섯 밤동안 이야기를 나누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 이야기는 주로 '아이라'라는 선생님의 동생에 대한 것이고, 이 인물의 성장과 출세, 몰락을 이야기하는 biography로 읽히기도 한다.


 우리나라에도 '반공주의'가 있다. 지역구도보다, 성별대결보다, 세대차이보다 더 뚜렷하게 한국의 정치 지형을 만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반공주의'일지 모른다. 색깔론. 종북몰이. 종북세력. 빨갱이 운운.. 2015년의 한국 정치는 나에게 혐오감과 좌절감을 준다. 그런데 미국의 비슷한 반공주의 운동인 '매카시즘' 광풍의 세기를 다룬 이 책은.. 나에게는 현실감이 더 떨어져서 다가온다. 우선, 미국 70-80년대의 미국의 정치문화나 정치지형에 대해 익숙하지 않고, 실제 대통령들이나 측근, 인물, TV 스타, 라디오 스타, 셀러브리티 등의 이름들이 계속해서 등장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뇌리에 와닿는 촉감이 적은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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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카시 상원의원의 블랙 리스트. 매카시즘 광풍, 배신, 밀고, 추방, 정치적 처형, 이념과 투쟁... 이렇게 크고 추상적인 단어들이 이데올로기의 버프를 입어 전 세계에 불어닥쳤을 시기가 있었다. 가끔은 아주 조용하게. 냉전시대.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세류의 흐름을 타면 그 이데올로기가 단순화되고 전형화되면서 주류가 되는 동시에, 그 속의 개인성, 특별성, 비극, 개별적 인생들은 다 휩쓸리고 만다. 그 광풍의 세월 속에서 일어서고 또 스러져갔던 인물 '아이라'를 다시 호명해내는 과정이 이 소설 자체라고 느껴졌다. 이념에 복종하는 예술을 운운하던 어린 네이선에게 대학 교수인 레오가 하는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정치란 위대하게 일반화시키는 것이고," 레오는 내게 말했다. "문학은 위대하게 특별화시키는 것이다. 이 둘은 서로 반대 관계에 있을 뿐만 아니라 적대적인 관계에 있다. 정치에게 있어 문학은 퇴폐적이고, 부드럽고, 엉뚱하고, 지루하고, 잘못된 생각을 고집하고, 무미건조하다. 실제로 있지도 않은, 이치에 닿지 않는 뭔가를 끄적거려 놓은 것이다. 왜냐? 특별하게 만들고자 하는 충동이 바로 문학이기 때문이다. 네가 만약 예술가라면 그런 충동을 거부할 수 있을까? 하지만 네가 정치가라면, 과연 너의 정치에 그런 '특별성'을 허용할 수 있을까? 예술가로서 너에게는 그 충동이 네 과업이다. 네 과업은 단순화시키는 것이 아니야.


  그래서 주커먼은 '반공 낙인이 찍혀 몰락한 라디오 스타'로 아이라를 묻기보다는, 그의 인생을 이야기한다. 역사적 흐름의 희생자로 박제시키기 보다는 더 생생한 감정과 순간을 살았던 인물로 끌어올려 주는 것 같다. 이야기를 듣고 할 수 있는 일은 이야기를 하는 일 밖에 없다. 이념화, 정치화, 이상화는 어쩔 수 없이 단순한 박제물이 되어버리기 때문일까.


  "나는 아이라의 이야기를 아는 유일한 사람이고, 자네는 그 이야기에 관심을 가진 살아있는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이지. 그게 이유야. 다른 사람들은 모두 죽었거든." 선생님은 웃었다. "나의 마지막 의무는 네이던 주커먼과 함께 아이라의 이야기를 정리하는 것이야"

  "제가 그 이야기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그건 내 책임이 아닐세. 내 책임은 자네에게 이야기해주는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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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가지 생각이 들지만, '아이라'라는 인물이 신화적이고 인류 보편적인 어떤 정형성을 획득했다는 두루뭉술한 인상이 들었다. 실제로 소설 중간중간에 셰익스피어의 햄릿, 오셀로, 맥배스 속의 다양한 인간상이 언급되고, 소설 마지막으로 갈수록 역시나.. '아이라'의 인생을 통해 필립 로스가 무섭게 노려보는 인간사의 반복적이고 끔찍한 정형적 특성 같은 것들이 드러나 보인다. 아마도 이 소설에 극명하게 드러난 특성은 '배신'인 것 같다.


  "미국 역사상 그 어느 시기보다 세계대전이 끝난 후 10년, 그러니까 46년과 56년 사이에 개인적인 배신이 많이 행해진 것 같아. [...] 전에 그 언제 이 나라에서 배신이 그렇게 칭찬과 보상을 받았었나? 당시에 배신은 어디서나, 어느 미국인이나 저지를 수 있는 용서되고 허영되는 죄였네. 배신의 즐거움은 금기시 되던 행위들을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도덕성을 포기하지 않고도 죄를 저지를 수 있었어. 애국적으로 배신하는 동시에 - 즐거움과 약함, 공격과 수치라는 모호한 요소들을 가진 배신의 흥분에 만족을 느끼는 동시에 - 자신의 순수함은 보전하는 거지. 상대를 해치는 데서 오는 만족. 애인을 해치고, 경쟁자를 해치고, 친구를 해치고 얻는 만족인 게야. 심술궅고 불법적이고 부서진 즐거움의 영역 속에 배신이 있네. 조작되고 비밀스럽고 흥미로운 즐거움에는 인간의 관심을 끄는 상당한 뭔가가 있지.



  매카시즘의 광풍과, 할리우드 영화배우와 결혼한 라디오 스타의 몰락은.. 아마도 그 당시에 미국 옐로우 저널리즘의 가장 쉽고 흥미로운 표적이었을 것이다. 쉽게 등가적으로 이야기 할 수는 없지만, 한국에서도 만약 서해교전이나 연평도 공격 같은 비극이 일어난 후에 아주 유명한 스타 커플이 이런 종북시비에 얽혀든다면, 온갖 인터넷 포털과 신문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고 온 국민이 이 가십에 대해 -마치 세계 종말 전의 마지막 흥미거리라도 되는 양- 열심히 씹고 헤치고 논평할 것은 뻔하지 아니한가.


[....] 일단 한 인간의 비극이 완성되면 언론은 그걸 진부한 연예물로 만들어버리거든. 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민주공화국의 통일 신조로서 가십 승리의 시대가 막을 연 것은 전후 매카시 시대라고 생각하고 있네. 어쩌면 그건 모든 비 이성적인 광기들이 일거에 표출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신문에 어설프게 실린 기사들을 내가 그냥 지나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 우리가 믿는 것은 가십 속에 있다. 복음서와 국가적 신념으로서의 가십. 매카시즘은 진정한 정치학의 시작이 아니라 대중을 즐겁게 하기 위한 진지한 연예물의 시작이었어. 지금이야 생각없는 미국인들이 사방에 깔려 있지만, 매카시즘은 전후 시 생각 없는 미국인들이 첫 번째로 꽃을 피운 존재였지.


  단순화된 이데올로기와 단순화된 적. 그 앞에서 심화된 논리와 창조적 사고는 힘을 잃는다. 말과 선동의 힘에 대중이 움직이고, 여론이 형성된다. 그 뒤에 주류 언론과 정치가 있다면, 그 여론 역시 주류가 되고 단순화된다. 냉전시대에 미국 정치에 유효했던 이 반공주의는, 안타깝게도 한반도의 분단상황 때문에 한국의 정치지형에 여전히 유효하다. 복지하자고 하면 빨갱이. 애들 살리자고 하면 빨갱이. 비판하면 빨갱이. 다르면 빨갱이. 레드 컴플렉스가 지울 수 없는 지형으로 견고한 우리네 정치지형에서, 이렇게 빨갱이 찾기 놀이는 얼마나 쉽고 유효한 정치 전략인가. 너무 쉽고 믿을 수 없이 유효해서, 지금도 뉴스를 보면 심각하게 고민하곤 한다. 우리의 정치지능 (이라는 것이 있다면)의 수준에 대해서. 정치 지능이 대의 민주주의제에서 자신을 대표할 가장 나은 리더를 선출하는 선거의 향방을 결정하는 요인이라면.. 우리를 대표하고 있는 정치인들과 정치 리더들의 수준이 바로 우리 모두의 정치 지능을 가늠하는 지표가 아닌가? 그래서 심각하게 고민하고는 한다는 것이다. 


  "빨갱이, 빨갱이, 빨갱이, 하지만 미국에 있는 누구도 도대체 빨갱이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어. 그들은 무엇을 하며, 무슨 말을 하며, 어떻게 생겼을까? 빨갱이는 함께 모이면 러시아어, 중국어, 이디시어, 에스페란토어로 얘기하나? 빨갱이들은 폭탄도 제조하는가? 아무도 알지 못했네. 그래서 이브의 책이 가졌던 해악을 이용하기 쉬웠던 거야.



  인간의 삶과 정치, 배신, 비극에 대해 다양한 생각이 들었지만.. 소설 말미에 나왔던 대화가 뇌리에 박힌다. 


"전부 오류다" 내가 말했다. "선생님께서 계속 제게 말씀하셨던 것이 그것 아닙니까? 거기엔 오직 오류만이 있다. 거기에 세상의 본질이 있다. 누구도 그의 인생을 찾을 수 없다. 그게 인생이다."


  배신은 정적인 시스템이 아니다. 배신은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와도 같다. 살아있는 것은 모두 움직이니까.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끝없이 추구하고자 하고 믿고자 하는 가치 혹은 정당성과 같은 '큰 거짓말'이 없다면 나는 내 존재에 대해서 항상 의문을 품을 수 밖에 없다. 나는 나의 '큰 거짓말'이 적어도 세상에 해는 끼치지 않았으면 하는.. 긍정적인 비관론자임이 드러났다. 필립 로스의 소설은 언제나  돌고 돌아 내 인생에 대해 근본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게 만들어준다. 그 언제고 정의롭고 모두가 행복한 시절이 있었던가? 있기나 할 것인가? 있으면 언제? 사후에? 이 문제에 대해 나는 근본적으로 비종교적이고 비관적이다. 삶의 진실이나 거대한 장막 뒤의 알수 없는 진리에 대해 알지 못하는 채로 참고, 알려고는 노력하며 그렇게 살아갈 뿐이다. 


  위대함을 자처한 뽐세는 구역질난다. 특별함을 자처한 허세는 볼만 하다. 


  쥴리언 반스의 소설에 나왔던 펀치라인이 생각난다.


  '거대한 혼란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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