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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속을 걷다

야만적인 앨리스씨 - 황정은

by 주말의늦잠 2015. 7. 17.



야만적인 앨리스씨

저자
황정은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3-10-3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재작년 가을에 오사카를 방문했다가 한신백화점 지하보도에서 여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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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은 작가의 소설에는 뭐랄까, 구조적으로 갇혀버리거나 영원히 하강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은 것 같다. 

파씨의 입문이라는 단편소설집을 읽었을 때에도, 하수구가 없는 싱크대나 끝없이 하강하는 이의 이미지가 그려졌었다.

역시 야만적인 앨리스씨에도 그러한 이미지가 포착된다.

지하방에 빼곡히 차들어있는 아이들의 머리통과 벌린 입이라던가,

끝없이 토끼굴로 하강하는 앨리스, 죽은 개의 뼈와 장기가 언덕을 이루어 그 양분으로 자라는 느티나무, 등등


-


야만적인 앨리스씨에서 나에게 가장 강력하게 다가온 이미지를 뽑으라면,

하나는 가죽인지 눌러붙은 쓰레기인지 분간할 수 없이 오래된 개의 사체 주위로 사계절이 지나가는 모습,

그리고 다른 하나는 여자 스카프나 천조각을 덮어쓴 허름한 남자아이의 형상이다.


첫번째 이미지가 아마도 책 표지의 까만 형상과 연결되는 것 같다.

그만큼 이 소설에서 가장 처절한 삶을 사는 인간에게 더 처절하게 짓밟히는 존재로서의 개,는 중요한 듯하다.

앨리시어의 아버지와 동네 어른들이 즐겨 먹는 개, 개를 키워서 잡아먹는 작태는 정말 읽기 힘들었다..

철장에 갇혀 끝없이 번식하고, 자신의 새끼가 음식화되는 모습을 지켜보는 개와,

가정의 폭력과 주위의 무관심에 겉만큼 속도 다쳐가는 앨리시어와 동생.

소설을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처연해진다.


-


이 소설을 읽다가 흠칫, 놀랐던 부분은 욕설이 엄청나게 등장한다.

앨리시어에게 '씨발'은 이 세계나 인간에게서 가장 어긋나고 뒤틀려 침체하고 부패해 상해버린 어떤 부분을 일컫는 것 같다.

이 말이 소설 속에서 계속 어떤 상태를 표현하거나, 묘사할 때 발화되기 때문에...

어느 순간 나는 이 말이 평소의 상스러운 욕이 아니라 형용사로 느껴졌다.

앨리시어가 느낄 수 밖에 없는 이 세계의 덩어리와 상황을 표현하는 데 가장 적절한 형용사...처럼 말이다.


앨리시어의 어머니는 발작적으로 이 '씨발됨'의 상태로 가곤 하는데,

그 때마다 앨리시어와 동생은 있는 힘을 다해 맞고, 어깨죽지를 잡히고, 꼬집히고, 구타당한다.

이 때 이 작가적 화자는 그들의 엄마가 '앨리시어의 짐승'을 다루고 있다고 서술한다.


이 '가정폭력'에 대해 외부의 인물들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이웃들은 무관심이나 용인, 혹은 뒤틀린 관심. 아버지는 조용한 묵인.

그리고 '가정폭력과'의 상담원은 앨리시어가 '씨발년'이라고 표현하는 걸 듣고는,

그의 부모님들에게도 그런 이유가 있을 것이라며 함께 상담 내방을 하라고 조언한다.


이 세상 가장 어둑하고 은밀한 곳에서 일어나는 폭력에 대해, 바로 우리가 취하는 모습이다.

그래서 작가는 계속 이렇게 묻는 듯 하다. '그대는 어디까지 왔는가'

그리고 앨리시어에게 이런 세상은 이렇게 느껴지지 않을까. 발췌.


별도 뭣도 없는 갤럭시의 공간은 얼마나 불어났을까.

하여간 근사할 것이다. 거대하고 아름다울 것이다. 별과 우주가스가 모인 곳은 붉은 머리카락 다발같고 보라색 꽃같고 용맹한 말의 머리 같고 노랗고 파란 눈동자 같을 것이다. 지금도 부지런히 팽창하고 있을 것이다. 팽창하고 팽창해서 별들 간 간격이 엄청나게 멀어져버린 갤럭시에서 앨리시어는 한 점도 되지 않을 것이다. 한 점 먼지도 되지 않는 앨리시어의 고통 역시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런 갤럭시는 좆같다.

앨리시어의 고통이 아무것도 아니게 될 갤럭시란 앨리시어에게도 아무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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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애정있게 바라보는 인물들이나 동물들은 모두 이름이 있다.

앨리시어, 고미, 팥 등등.. 그리고 나머지는 '앨리시어의 어른들', '앨리시어의 노인', '이웃' 등으로

객관화되어 표현된다. 그런데 마지막에 정말 마음아픈 부분이.. 앨리시어의 동생만은 이름을 갖지 못하고 죽는다.


앨리시어는 그의 동생을 야,라고 부른다. 그대에게 그 이름을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다.

여태 노력했으나 그 이름 여태 말할 수 없다.


차라리 이것이다.


앨리시어의 실패와 패배의 기록이다.


그대는 어디에 있나.



마음이 쿡쿡 찔리는 소설이다.

작가는 일본 여행을 갔다가 한 남자가 여자 옷을 입고 거리를 걷는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남자가 다른 모든 사람과 달리 살짝 기울여져 걷는 이미지로 느껴졌다고 한다.

바로 이 부분에서 소설이 시작한 것 같다.

끝없이 토끼굴로 하강하는 앨리스의 남자이름은 앨리시어다.

그의 동생은 평생 얻어맞고 온 몸에 찰과상이 가득한 몸으로, 이름도 없이 죽었다.

과연 이게 소설일까. 아니면 우화일까.



내가 황정은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좋다,고 느끼는 것은 이야기 자체라기 보단, 작가의 관점이다. 

상처나고, 갇혀버리거나, 하락하거나, 힘없이 스러진 존재들을 보듬는 작가의 시점에서 따뜻함이 우러난다.

소설은 담백하고 서술에서는 그 어떤 연민이나 감정적 동요도 느껴지지 않으나,


이 소설 자체가 가볍게 떨리고 있는 양.. 그 속에 작가의 따뜻함이 녹아있다.

그래서 나는 황정은 소설을 읽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