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자 의식의 흐름]
인간은 언어로 세계를 감지하고 이해한다면, 단어로 그 구체성을 더듬어 가는 게 아닐까. 단어에 대해서 많이 생각한다. 요즘 칼퇴 대신 정시퇴근이라는 말을 쓰자는 이야기를 들으며 이 생각을 실마리를 잡았다. 칼퇴는 마치 퇴근하면 안 되는 업무의 줄기를 칼로 끊고 나가버리는 느낌이 연상되는 단어라면 (물론 그래서 후련하다), 정시퇴근은 정시, 즉 시간이 되서 퇴근하는 조금 더 합리주의적 단어랄까? 어떤 단어를 쓰느냐에 따라 똑같은 행동이나 현상이 다르게 비춰진다. 정규직 대 비정규직도 마찬가지다. 정규직 앞에 非를 붙여서 마치 정규직이 기본이고 비정규직은 땜빵용으로 쓴다는 느낌이 강해진다.
만약, 계약직이 주를 이루는 세계에서라면 어떨까? 정규직은 非계약직으로 불리지 않을까? 이런 세계는 사실 적자생존과 노동시장 유연성을 필두로 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관과 맞닿아 있지 않을지도.. 이념이나 사상성에 대해 논하려는 것은 아니고, 단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런 세계관을 지향하는 방식으로 변하고 있다고 느낀다. 그걸 말하고 싶었다.
이걸 두고 세계가 잘못 되었다느니, 사회가 불합리하다느니 하며 불평하는 것은 결국 이 풍토에서는 걍 소득없는 정치싸움이 될 뿐이지 않은가? 얼마 전 읽은 '철학자와 늑대'라는 책에서 아주 감명깊은 구절이 있었다. 새끼늑대를 키우던 철학자, 마크롤랜즈는 새끼 늑대와 산보를 하던 중 커다란 불독이 새끼늑대의 목덜미를 물어 땅에 내팽개치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리고 그 새끼늑대는 울거나 비명을 지르는게 아니라 '어리고 약한 실존에서 나오리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냉철함'으로 작게 으르렁거렸다는 것이다.
1인 1스마트폰 시대가 도래하면서 우리는 비명을 지를 출구가 너무 많다. 다들 너무 힘들고, 지치고, 견디고, 감수하고, 흘리고, 쏟아부으며 사는 소리가 정말 크다.. 듣고 있는 사람도 유격을 위해 높은 산을 오르고 벌써/이미 헐떡거리는 병사마냥 벌써 지치고 이미 힘들다.
-
앞서 계약직이 주를 이루는 세계를 언급했는데, 나는 사실 이 세계를 만나봤다. 우리 동아시아 유교문화권처럼 家(가족)의 개념이 國家와 같은 넓은 범위의 단위에까지 확대적용되지 않는, 그런 문화권에서는 우리보다는 '비정규직'적 요소가 사회전반에 더 두드러지는 듯 하다. 레쥬메에 적힌 회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 능력을 인정받는 세계. 레쥬메에 회사가 너무 많으면 변절자로 생각하는 가치관과 아주 달라서 처음에 이걸 듣고 신선했다.
그래서, 오늘 의식의 흐름이 닿기를, 앞서 나는 소위 '평생직장' 개념이 옅어져가는 방향으로 세계의 축이 돌고 있다고 선술했다 (혹은 적어도 내가 느끼기엔). 그 말인즉 아무도 나 책임 안 진다는 거다. 나 다니던 회사가 힘들면 나 짜를거라는 거다. 최악을 예상하며 시작을 맞이해야 한다. 실직(퇴사)을 생각하며 구직을 하고, 이혼을 생각하며 결혼을 해야, 죽을 생각을 하고 살아야, 역설적으로 나는 더 잘 살 수 있다. 이게 바로, 이 시대의 미생들이 장착해야할 실존의 갑옷이다.
내가 나를 책임지고, 세상이 내 목덜미를 물어 바닥에 내팽겨질때, 우리의 약한 실존에서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냉철함으로 으르렁거리는 것. 울고 짜고 콧물이 뒤범벅 된 얼굴만큼 처량하고 불쌍하고 보기 싫은 것도 없다. 짜지 말고, 내가 나를 책임진다. 내 선택에 내가 책임을 진다.
- 12월, 2014
'일상적인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성검사의 추억 (0) | 2015.01.11 |
---|---|
이해의 깊은 간극 (0) | 2015.01.06 |
OECD 평균에 비춰본 우리의 삶 (0) | 2014.12.05 |
갑을관계에 대한 단상 (0) | 2014.11.24 |
지하철 출퇴근 속에서 받았던 영감 (0) | 2014.1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