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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적인 생각

과거의 기록에서 나를 찾기

by 주말의늦잠 2014. 10. 15.


우리 집은 이사 다닌 기억이 별로 없다. 지금 사는 집에서도 아주 오랫동안 살았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입학하면서 들어왔으니, 뭐 어언 그 정도 되었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렇다 보니, 내 방 서랍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차곡차곡 쌓아온 잡동사니의 다락방이 된 느낌이다. 초등학교 반장 부반장끼리 모여 찍은 단체사진, 쎄보이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고등학교의 모습들, 빠순이가 되어 가입했던 신화창조 카드, 영어공부 카세트, 둘리 물감과 파스텔 세트, 고장난 탁상시계, 다양한 년도의 스케쥴러들. 그 당시 나를 정말 사랑하던 전 남자친구가 만들어준 음악 CD도 발견했다. 나는 이런 걸 받은 기억이 없는데, 아마 당시의 나는 CD를 받고도 틀어보지도 않은 냉혈한 여자였을지도. 그래도 가장 내 마음을 끄는 것은, 사람들이 나한테 보내준 편지묶음이다. 


손으로 쓴 다양한 글씨체의 주소가 적힌 겉봉을 살펴보며, 나는 하나씩 빼어들어 읽어보았다. 갑자기 시간 여행을 하는 듯 했다. 잊혔던 그 시절, 그 아이가 나한테 이렇게 긴 편지를 썼었구나. 그 편지들 속에는 나의 모습도 반영되어있다. 사실 내가 더 관심을 갖고 보는 것은, 그런 나의 모습과 그 동안의 변화이다. 내가 그 땐 그렇게 바쁘려고 노력했었지, 최대한으로 나의 활동 반경을 넓혔었지, 활동적인 것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고, 노력하면 안 되는게 없다던 긍정성으로 무장했었지. 나는 정말 열심히 사는 아이였던 것이다. 필경 나의 과거의 모습은 현재 나의 모습을 돌아보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기억은 왜곡되기 마련이니까. 내가 이렇게도 그 관계에 신경을 썼던가? 하다가도, 당시에 썼던 일기를 읽어보면 나의 세포 구석구석까지 그 걱정으로 가득 했음을 느낀다. 정말 힘들었었지, 하다가도 당시의 기록을 보면 흔하디 흔한, 대학생의 진로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나라는 개인이 겪는 일들은 보편적으로 치환 가능하다. 대학생의 고민, 취준생의 고뇌,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다들 겪는 이야기. 그 보편적으로 치환 가능한 이야기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어떤 이는 특별하게 만들 필요도 못 느낄 것이다. 어떤 이는 돈을 벌 것이고, 어떤이는 음악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특정한 집단의 사람들은 글로 된 이야기를 만들어 낼 것이다. 


나에게는, 지나가면 스러질 이 모든 허무함에 대항하는 방법은 이 뿐이라 생각한다. 꾸준히 쓰고, 기록하는 것. 이것은 누구에게 읽히기 위해서가 아니다. 바로 지금의 나에게 살아갈 이유를 주기 위해, 수천만의 동시대 인구라는 큰 개념 속의 개별적인 인간으로서, 이름을 얻는 행위이다. 나는 분노해도 체념할 수 밖에 없으면서도, 비판해도 순응할 수 밖에 없으면서도, 살아갈 동력을 찾기 위해서는 개별성을 획득한 특별한 공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나만의 공간. 나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가 말한 '자기만의 방'. 



- 10월, 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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