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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속을 걷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 나쓰메 소세키

by 주말의늦잠 2016. 2. 4.



  이 소설은 고양이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다. 동물이나 식물, 사물이 화자로 등장하는 소설은 현대에 와서는 그리 어색하진 않다. 서술의 관점을 바꿔본다는 것은 이야기를 180도 뒤집는 방식이기도 하고, 독자들에게 참신한 충격을 안겨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 소설이 나왔을 시기 즉, 근대의 언저리인 1905년에 고양이가 화자로 전면에 등장하는 소설은 큰 대전환을 이루는 일본 문학사의 '사건'이었음은 틀림없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2016년 한국땅을 딛고 살아가는 나에게도 큰 즐거움을 주었다. 먼저 이 이름도 없는 길거리 나부랭이 고양이가 한 선생의 집에 얹혀 살게 되면서 선생과 그의 친구들과 가족, 등장인물들, 주변에 일어나는 사건을 관찰하고 그에 대해 나름으로 논하기 시작한다. 고양이가 말한다는 것 자체가 소설적 설정이니, 그 현실성이나 논리적 정합성은 따질 이유가 없다. 단지 이 고양이는 태어난지 2년도 되지 않아, 인간과 세상사를 논하고, 호연지기를 기르며 세상을 비판적으로 통찰할 줄 아는 것 같다. 쥐 한마리도 못 잡으면서 결국 애완동물은 주인 따라간다고, 선생처럼 집에서 놀고 먹으며 인간사를 공부하고 세상을 논하는 폼세가 또 굉장하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나는 이고양이가 뭐든지 되는대로 갖다 붙이거나, 자신의 약점을 궤변으로 둘러막는 언술을 보며, 귀엽고도 발칙한 놈이라고 생각했다. 


  이 고양이가 말하는 (참 어이가 귀에 차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하는) 부분들. 길어서 인용할 수는 없지만 단연코 제일 재미있는 부분은 이 고양이가 떡을 먹고 이빨에 달라붙어 고군분투하는 부분과 쥐를 잡으려고 시도했다가 결국은 실패하고 쉽게 포기하는 장면. 그리고 '코줌마'랑 선생이 알력 다툼을 할 때, 나는 피식 현실 웃음을 웃기도 했다.


p.331 자기가 제조하지 않은 것을 자기 소유로 하는 법은 없다. 자기 소유로 정해도 지장은 없으나 남의 출입을 금할 이유는 없다. 이 망망한 대지에 간교하게 담을 둘러치고 말뚝을 세워 아무개 소유지라고 선을 긋는 것은 마치 저 푸른 하늘에 줄을 치고 '이 부분은 내 하늘, 저 부분은 네 하늘'하며 신고하는 것과 같다. 토지를 잘라서 한 평 얼마의 소유권을 매매한다면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를 사방 한 자로 잘라서 판매해도 좋을 터이다. 공기를 잘라 파는 것이 불가능하고 하늘의 구획이 부당하다면 토지 사유도 불합리하지 않은가. 이러한 철학을 가진 나는 그러므로 어디에도 들어간다.

p.747 내가 쓰는 내용이 입에서 대추우 나오는 대로라고 생각하는 독자도 있을지 모르나, 나는 결코 그렇게 경솔한 고양이가 아니다. 일자일구 속에 우주의 대철학을 포함한 것은 물론, 그 일자일구가 층층이 연속되면 수미상응하고 전후상조하여, 그저 잡담이라고 생각하며 읽던 것이 돌연 표변하여 심오한 법어가 되므로, 결코 드러눕거나 앉아서 발을 뻗고 다섯 줄씩 한 번에 읽는 무례를 연출해서는 아니 된다.

p.802 거울은 자만의 제조기인 동시에 자만의 소화기다. 만약 허영심을 가지고 대할 때는 어리석은 이를 이처럼 선동하는 도구도 없다. [....] 그러나 자기에게 정이 떨어졌을 때, 자아가 위출되었을 때는 거울을 보는 것만큼 약이 되는 것도 없다. 미와 추가 명백하다. 이런 얼굴로 인간입네 하고 거드름 피우며 오늘까지 살아왔다고 깨달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인간 생애 중 가장 고마운 시기다. 스스로 자기의 어리석음을 인지하는 것만큼 훌륭하게 보이는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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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고양이가 등장인물을 관찰하고, 그 인물 (특히 선생)의 마음을 읽으며 (그렇다. 이 고양이는 인간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데, 어떻게 이런 능력을 갖게 되었는지는 묻지 말라고 이야기 하기도 한다) 이야기를 주저리 주지러 해나가는 방식이 참 재미있다. 왜냐하면, 사실 이 고양이가 하는 말은 소세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다. 특히 소설의 마지막에 '개인성'과 '근대성'을 다루는 논의에서는 분명히 소세키가 지향했던 '동양적 근대주의'의 실마리가 가감없이 나타난다. 그런데 이 고양이가 얹혀사는 이 집의 주인의 선생의 프로필이 소세키와 아주 닮아있다. 도쿄 제국대학을 나오고, 현재 영어 교사를 하고 있는 점이라던가. 그래서 고양이의 묘사와 행동거지는 소세키가 고양이를 면밀하게 관찰해서 서술했음이 분명하지만, 소설에서는 반대로 그 고양이가 소세키의 '셀프 디스'격으로 보이는 그 선생을 관찰하고 비판하는 게 흥미롭다. 


p.414 매일 밤 읽지 않는 책을 수고스럽게도 침실까지 운반한다. 욕심을 부려 서너 권이나 품고 올 때도 있다. 지난번에는 웹스터 대사전까지 가져왔을 정도다. 생각건대 이것은 아저씨의 병으로, 사치스러운 사람이 명품 쇠주전자에서 나는 솔바람 소리를 들어야 잠이 들듯 아저씨도 책을 머리맡에 두어야 잠이 드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아저씨에게 책은 읽는 것이 아니라 잠을 부르는 도구다. 인쇄된 수면제다.

p.670 원래 아저씨는 동네에서 유명한 기인으로, 실제로 어떤 사람은 확실히 정신병이라고 단언할 정도다. 그런데 아저씨의 자신감은 너무 높아, 자신은 정신병이 아니며 세상 놈들이 정신병이라고 강력히 주장한다.

p.915 아저씨가 무능한 사람이기는 하다. 그러나 지금 세상에 유능하다는 사람을 보면, 거짓말로 사람을 낚고, 눈 감은 사람 코를 베어가고, 허세를 부려 사람을 위협하고, 사람을 꾀어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사람뿐이다. 중학생 같은 애송이도 이를 흉내 내어 이렇게 해야 행세를 한다고 잘못 알고 있으니, 원래는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해야 당연한 것을 득의양양하게 이행하며 미래의 신사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자는 유능한 사람이라 할 수 없다. 무뢰한이라고 해야한다. [....]

  나도 일본 고양이니까 다소 애국심이 있다. 이런 사람을 볼 때마다 때려주고 싶어진다. 이런 자가 한 사람이라도 늘어나면 나라는 그만큼 쇠퇴한다. [....] 일본인은 고양이 정도의 기개도 없는 듯 하다. 한심한 일이다. 이런 놈팡이들에 비하면 아저씨는 훨씬 나은 인간이라 할 수 있다. 패기가 없으나 훨씬 월등하다. 무능한 것이 월등한 것이다. 약삭빠르지 않은 것이 월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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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에는 먹물 좀 먹은 듯한 젠체하는 고양이의 발칙한 모습이 정말 재미있어서 소설을 읽어나갔는데, 마지막으로 갈수록 소세키의 메시지가 뚜렷해진다. 메이지 시대를 배경으로 일본의 근대화를 겪은 소세키. 서양의 근대성, 서양의 개인주의, 서양의 근대성과 서양의 합리성이 물밀듯이 들어오던 그 시기에 소세키는 서양문명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자아의 성찰과 자연으로 돌아가는 소극적이고 동양적인 개인주의에 손을 들어준다.


  "나는 자유를 원해서 자유를 얻었어. 그런데 자유를 얻었지만 자유가 가져다준 불편함에 난처해. 그러므로 서양 문명 따위는 좋은 듯 해도 틀려먹은 것이야. 이에 반해 동양에서는 옛날부터 마음 수양을 했어. 그쪽이 바르지./ 보게. 개성 발전의 결과 모두 신경쇠약을 일으켜 어찌할 수가 없게 되었을 때 '덕이 있는 왕의 백성은 배가 부르다'는 말의 가치를 비로소 발견하니 말이야. 무위로 돌아간다는 말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으니 말이야. 그러나 깨달아도 그 때는 이미 소용 없어. 알코올 중독이 되고 난 후 '아아, 술을 안 먹는 게 좋았을걸'하고 생각하는 것과 같지."


  자유의 팽창과 개성이 온전해지며 우리는 정말로 더 불편하고 난처해진 부분도 있을지 모른다. 모든 인간에게 평등한 인권이 주어진 대신, 우리는 우리의 삶을 제어하고,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질 의무를 진다. 가끔 이 신자유주의적 세계에서 누가 떠먹여주는 밥숟가락을 원했던 적은 없던가? 자라고 배워서 내 길을 선택하기 보다는, 할아버지, 아버지가 계속 해오던 가족 사업을 물려받는 이웃이 부러웠을 때는 없었을까? 자아가 팽창하고, 자의식이 불현듯 커져서 예민해지고 우울해진 이들이 주변에 없던가? 그렇다. 소세키의 고민은 현재진행형이다. 특히 우리나라 한국은 근대를 식민지와 전쟁의 경험으로 대체했기 때문에 여전히 물질적 성장과 근대성이 불합하는 모습이 폭발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과연 현재 우리에게 있어, '진보'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한국적 가치라는 것은? 우리의 현대성은 과연 굳건한 근대성 위에 자리한 것인가? 그 근대성이라는 것이 결국은 완전한 수입품이 아닌가? 우리는 개인성, 권리, 국가, 자유 그리고 국가적 가치에 대해 생각해볼 새도 없이 물질적 성장에만 매달려왔다. 그래서 유구한 정신적 발전을 이뤘던 우리 조상들과는 달리 매우 핍진한 정신과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것 같기도 하다. 진지하게 논의하는 자세는 '설명충'으로 격하된다. 삐까뻔쩍하고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는 속물근성과 이기주의의 팽배. 자기 자신과 사회, 국가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는 개인이 모인 사회는 결국 '헬조선'이 되었다. 재미있는 소설을 읽고 마지막에 이런 생각을 하며 뒷 맛이 씁쓸했다. 


  내가, 개개인의 시민이, 우리 사회에 가질 수 있는 희망이란 어떤 것일까.. 계속 생각해보는 문제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