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늑대를 완독했다.
책을 덮으며 한 번, 두 번, 여러 번 더 읽어야 겠다고 다짐하는
아주 좋은 책이다. 장비를 점검하고, 마음가짐을 다지는 영장류에게는 최고다.
완전 철학서라 하기에는 개인적이고, 개인적 에세이라 하기에는 철학적이다.
책의 표지에 쓰인대로, 늑대 브레닌과의 11년간의 동거일기가 딱 적절한 듯 하다.
책을 읽다보면 저자인 마크롤링스도 참 미친놈이라는 생각이 드는겤ㅋㅋㅋ
27살에 충동적으로 산 늑대와 11년간을 살면서
철학 강의에 이 늑대를 데려가고, 종 분류가 안 되어 애매한 상황에서는
개라고 속여서 유럽과 미국 등지를 돌아다니며 살았던 것이다.
뭐 그게 뭐 대수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야생늑대와 함께 문명에서 산다는 것은, 늑대가 뛰어놀 드넓은 전원이 필요하고,
집의 커튼이나 귀중한 가구 등은 항상 훼손 혹은 파괴의 위험이 있고,
늑대의 에너지와 삶을 영위하기 위해 매일매일 달리기와 식사의 일상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미친 (-_-;)철학자는 동물권의 옹호자이므로,
자신은 비건 (결국 나중에는 페스코 채식자가 된다)이고 늑대도 페스코 채식을 하게 된다.
그냥 이렇게 보면 이런 미친놈이 다 있나, 불쌍한 늑대까지 고기를 못 먹게 하다니! .. 하지만
철학자의 그의 논리구조 속에서, 자신과 늑대의 페스토 채식주의는 완전히 설득된다.
뭐 자신도 핏기가 가시지 않은 스테이크를 포기해야 하는 처량함을 대놓고 표현하고 있으니,
역시 도덕성은 비싼 거다. 불편한게 도덕인거다.
늑대 종에서 -자의든 타의든- 탈출한 외로운 늑대와, 인간 종에서 탈출한 외로운 괴짜 영장류의 만남.
참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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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롤랜즈와 늑대 '브레닌'
젊었을 적에 늘씬한 럭비선수로서 여자좀 후렸고
11년간의 인간 회의주의 및 은둔자로 살아온 결과,
엄청난 연봉과 유명세를 타고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는
쉼없는 뽐뿌질을 자랑하는 우리 저자님. 브레닌 진짜 크다!
이 책은인간이 서있는 근본적 철학적 토대를 흔들고,
인간과 인간의 '계약'이라는 사회적 가정 역시 흔들고,
영장류로서 우리가 행하는 행동과 생각하는 방식, 지향성 등이
늑대와 완벽한 대조적 대칭을 이루며 서술된다.
인간의 행동체계를 꿰뚫는 명확함에 마음이 쓰리기도 하고,
인간이 이루어 낸 사회 질서의 허무함에 헛헛하기도 하지만,
결국 마지막에는 그 헛헛한 아름다움에, 허망한 따뜻함을 위해,
궁지로 내몰리고 고통스럽고 힘들어도 으르렁거리겠다는 늑대스러운 다짐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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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에 따르면, 우리는 '순간 자체를 보기보다는 순간을 통과해서 보는 시간적인 존재' 이기 때문에
이 고통에 지배받을 마큼 충분히 과거와 미래 속에서 살고 있다.
왜 우리는 그렇게도 특정한 감정에 몰입하기를 원하는가?
항상 과거와 미래에 살고 있기 때문에 빼앗겨 버린 것, 즉 순간을 되찾으려는 시도이다.
그 반면, 늑대는 시간을 산다기 보다는 순간 자체에 집중하는 순간적인 존재이다.
아마도 개를 키워본 사람이라면, 개가 수십번을 준 그 간식에 집중하는
안달난 몸짓과 반짝거리는 눈빛을 보며 이 설명에 동의할 것이다.
개의 그 순간에는, 과거와 미래 그 어떤 것도 반영되지 않는다.
영장류의 인간만이, 과거와 미래를 살며, 현재를 유예하며 그 어떤 가치 혹은 목적을 위해 살아간다.
그래서 '순간'은 영속적으로 유예된다.
인간은 이리 생겨먹어서, 사실 순간에 집중한 다는 것은 불가능 한 일이다.
이러한 실존적 딜레마, 바로 시지프스의 신화이다.
영원히 바위를 끌어올려야 하는 시지프스의 과업이 공포스러운 이유는 사실,
그 과업이 힘들거나 시지프스가 불행해서가 아니다.
그 공포는 무언가 실패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아니라,
'애초부터 성공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아예 없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므로 대대후손을 넘어 인간종이 수행해가는 이 '밥 벌이'라는 것은 시지프스의 '바위'로 치환될 수 있지 않은가?
그래서 삶에서 중요한 것이 바위를 끌어올리는 등의 목표나 목적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목적이 이루어지자마자 더 이상 삶은 의미가 없어진다.
이것은 인간의 실존적 딜레마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크고 작은 목표와 목적으로 채울 수는 있겠으나,
그것들의 삶의 의미가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런것들은 인류 전체 종에
대대 손손 반복되는 것일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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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라는 것은 무언가를 쟁취하려는 영장류적 영혼의 유산일지 모른다 (고 저자는 말한다).
영장류에게 소유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소유한 것을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한다.
늑대에게 중요한 것은 소유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늑대가 되느냐는 것이다.
삶에서 가장 귀중한 교훈이 있다면, 삶에서 중요한 것은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이다.
그 중요한 것들은 시간의 피조물인 우리가 결코 소유할 수 없는 '순간'에 있다.
그렇다면 그 최고의 순간들은 뭘까? 그게 도대체 뭘까...
저자는 세 가지로 간략하게 설명하려 노력한다.
그에게 있어서 최고의 순간이란,
1. 존재의 지향점이 아니며, 삶의 누적이 아니다. 이 순간들은 세월이라는 시간 속에 흩어져 있다.
2. 최고의 순간에는 기분좋은 경우가 거의 없다.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불쾌한 순간,
혹은 우리 삶에서 가장 어두운 순간일 수도 있다.
3. 최고의 순간에 우리는 자신이 진정으로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
내가 '나' 혹은 '자아'라고 부르는 것들은 사실 환영이다. '나'라는 것의 실체는 없다.
실체가 중요하지도 않다. 중요한 것은 내 모든 최고의 순간들은 그 자체만으로 완전하다는 점이다.
나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인지 정의하여 그 존재를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나아가는 것이 의미가 없고 희망도 없을 때 비로소 우리의 최상에 도달한다.
최상의 상태가 되려면, 먼저 궁지에 내몰려야 한다.
고통이 몰려오고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낑낑대거나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
저항조차 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 내부 깊숙한 곳에서 어리고 약한 실존에서 나오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던
냉철한 으르렁거림이 울려나온다. 그 으르렁거림은 '엿 먹어라'는 외침이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닥난 희망과 긍정 끝에 남겨진 내 자신이다.
결국 끝에 가서는 시간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앗아갈 것이다.
시간은 우리의 힘, 욕망, 목표, 계획, 미래, 행복과 희망까지 모두 앗아갈 것 이다.
하지만 최고의 순간에 실재하는 내 모습만큼은 시간이 결코 앗아갈 수 없다.
- 12월,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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