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 속을 걷다

농담 - 밀란 쿤데라

by 주말의늦잠 2015. 1. 8.



농담

저자
밀란 쿤데라 지음
출판사
민음사 | 1999-06-2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매년 노벨문학상 수상 후보로 거론되는 체코 출신의 세계적인 문제...
가격비교



작년, 벌써 작년이 되버린 2014년,

밀란 쿤데라는 2000년 '향수' 이후로 14년 만에 '무의미의 축제'를 세상에 내 놓았다.

쿤데라 소설이 다 그렇듯이, 정말 쿤데라 적인 제목이다.


나는 무어라 해야할지 모를 이유로 '무의미의 축제'를 읽기 전에 쿤데라의 소설을 복습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모든 소설은 아니고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11권 정도니까) 우선 책장에 꽂혀있는 것들 부터.

살펴보니 비교적 얼마 전에 읽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1982)', '농담 (1965)', '느림 (1995)',

정체성 (1997), 그리고 '향수 (2000)', 총 5권이 있다.


생각해보면 쿤데라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나, 소설 전반을 지배하는 분위기

그리고 그 주제의식이나 이야기를 다루는 방식이 모든 소설들에 공통 분모로 놓여있기 때문에,

각 소설들의 제목을 뒤바꿔도 독자는 알아채지 못할지 모른다.

예를 들어, 오늘 갓 읽은 이 '농담'이라는 소설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라던가 '정체성', '향수'라는

제목을 갖다 부쳐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


'농담'은 쿤데라의 데뷔작인 셈인데, 첫 소설로 이런 심도의 걸작을 내놓는 그는 역시 거장이다.

반드시 살아서 노벨문학상을 받아야 할 인물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


'농담'을 읽으면서 첫 작품이라 그런지 몰라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보다 훨씬 극적이라 생각했다.

극적이라는 것이, 마치 무대에서 펼쳐지는 소극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라는 얘기다.

어떤 인물이 독백 혹은 방백을 하며 생각을 하고, 주요 인물간의 만남과 얽힘이 기묘하다.

그리고 주요 무대가 한정되어 있다는 점 (프라하, 오스트라바, 모라비아와 몇몇 전원마을과 도시들).




-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체코가 독일치하에서 독립하고,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가 시대이념이 되었을 당시이다.

그래서 현재 2015년에 읽기에는, 마치 과거에 박제된 느낌을 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한다. 

역사의 수레바퀴, 세계동포주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마르크스-레닌주의, 공산당, 트로츠키주의,

자아비판, 혁명, 정치범 등등... 자본주의의 첨단에 익숙해진 눈으로 이런 단어들은 생소하게까지 느껴졌다.

그렇게 공산주의의 기치가 높아가던 때의 체코, 만약 체코인이 이 소설을 읽는다면

마치 한국인이 소설 '광장'을 읽는 기분이 들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이념이 중요했던 시기, 이념으로 사람 목숨을 살리고 죽였던 시대, 낙관주의로 무장했던 세대,

개인주의 ''잔재''를 제거하고 전체성에 몰두했던, ''집단''에 광적으로 집착했던 시절...

얼마나 먼 이야기인가, 그러나 불과 100년도 되지 않은 과거의 이야기다.

한국인에게는 어쩌면 아직 진행형의 이야기가 아닌가?



그렇게, 이 소설의 모티프는 생성된다. '농담'이 농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시대에 농담을 했던 한 남자 이야기.

치기어린 마음에 좋아하는 여학생에게 했던 두 줄의 농담으로 공산당에서 축출되고, 대학에서 퇴출되어

그렇게 인생의 전락을 걸었던 주인공 루드빅과 그 주변의 주요 인물들.

사실 이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없다고도 볼 수 있겠다.

이 광활한 역사의 물결 속에서 - 그 누구나 - 될 수 있는 개인들의 이야기의 집합이 이 소설이니까.



잊혀지지 않는 굴욕의 순간이 있다. 잊으려고 해도 머릿속에 각인되 버린 실수가 있다.

지금 와서 백배 사죄하고 싶은데 할 수 가 없는 잘못이 있다.

인간은 그렇게 굴욕을 감내하고, 실수하고, 잘못하면서 살아간다.

수 천, 수만의 인간의 실수는 인류의 비극을 만들어 내고,

가끔은 한 개인의 잘못이 이해되지 못할 참극을 빚어낸다.


그렇다면, 이렇게 저질러진 실수, 이미 행해져 버린 잘못을 고칠 수 있는가...? 

이 문제는 이 소설의 주인공들을 이해하는 데 좋은 실마리가 되는 질문이다.

루드빅은 고칠 수 없다, 용서 되지 않는다, 라고 말한다.

제마넥은 고칠 수 있다, 화해하면 된다, 라고 말한다.

코스트카는 고칠 수 있다, 회개하면 된다,고 말한다.

루치에는 무슨 말인지 이해 못하겠다, 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각자의 질문에는 분명하지 않는 응어리가 김처럼 서려있다.

그럴수도 있지만, 그렇지도 않은 것 같이 자신이 행동하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루드빅은 자신의 전락에의 복수가 희극적인 소극으로 변모한 후 깨닫는다.


그렇다, 갑자기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 가지 헛된 믿음에 빠져있다.

기억의 영속성에 대한 믿음과 실수를 고쳐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그것이다.

이것은 둘 다 잘못된 믿음이다.

모든 것은 잊혀지는 것이고, 고쳐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엇을 고친다는 것은 망각이 담당할 것이다.

그 누구도 이미 저질러진 잘못을 고치지는 못하겠지만 모든 잘못이 잊혀져 갈 것이다.



인간은 그렇게 수도 없이 저질러온 실수와 잘못을, 현재도 행하면서 끝없이 망각해간다.

이미 '행하여진' 잘못은 고쳐질 수 없다. 단지 망각될 뿐이다.


그래서 이 소설 자체가 거대한 하나의 농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결국 마지막에 자기가 원하는 걸 성취하는 사람은 제마넥 뿐이니까.

아무리 회개하고, 복수의 날을 갈고, 침묵하며 참고, 고뇌해도,

수단 좋게 역사의 물결에 자신의 맡겨버리는 

제마넥만이 나이어린 금발 여인 (자신을 끝없이 존경하는)을 끼고 여유롭게 사라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