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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속을 걷다

축복받은 집 - 줌파 라히리

by 주말의늦잠 2015. 1. 26.



축복받은 집

저자
줌파 라히리 지음
출판사
마음산책 | 2013-10-1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2013년 맨부커상 최종심 후보 작가, 줌파 라히리의 퓰리처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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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줌파 라히리라는 작가의 소설을 처음 읽었다. 장편소설이 아니라 9개의 단편소설집이다. 빨간책방에서 방송하길래 아무 의심없이 바로 서점에서 집어들었다.


  놀랍게도 이 데뷰작으로 오헨리, 펜/헤밍웨이 문학상과 데뷰 이듬해에 퓰리쳐 상을 수상했다.  대단한 소설집임에는 틀림 없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이 소설의 원제는 'Interpreter of Maladies'로 '질병 통역사'로 번역되어 있다. 그런데 확실히 질병 통역사 보다는 축복받은 집이 우선 한국어 제목으로는 더 부드럽게 잘 읽힌다. 책 제목에 '질병'을 넣지 않은 것은 마음산책 출판사의 신의 한수인 듯 하다=_=


  9개의 모든 단편 소설들은 이민자들의 입을 빌리거나, 3인칭 서술자가 이민자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물론 이민자가 아닌 인도 본국의 어떤 삶을 그린 작품도 있긴 하다. 하지만 소설들을 일관적으로 관통하는 어떤 분위기는 바로 '이민자'라는 정체성에서 나오는 듯 하다. 


  이민,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임시적 혹은 영구적으로 이주하는 것을 의미한다.


  삶의 터전을 바꾼다는 것은 한 개인에게는 세계가 뒤바뀌는 일이고, 한 가족에게는 그 세계에 미주알 고주알 적응해야 하는 불편한 것이다. 그럼에도 다양한 이유로 인해 (이민의 이유를 다루는 것은 소설의 영역이 아니라 연구의 영역일 것이다) 그 다른 나라라는 새로운 세계에서 사는 그들의 이야기. 그렇다고 하여, 이 소설이 타국의 주류사회 속에서 겪는 이민자의 어려움이나 고통을 다루고 있는가 하면,그건 전.혀. 아니다. 


  오히려 일반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 부부간의 감정선, 이웃의 방문, 불륜, 보모 할머니, 신혼부부의 새 시작 등등...그 어떤 나라에서라도 그 어떤 곳에서라도 일어날 법한 주제들이 아닌가?


  그리고 그 특별하지 않은 주제들을 특별하게 미세조정하는 능력을 가졌다. 이 작가는 말이다. 어떠한 소설적 상황 속의 인물들을 그 상황 속에서 끝가지 밀어부치는 어떤 보이지 않는 시선이 느껴진다. 마음 속의 감정작용이나, 생각의 흐름을 갈퀴로 낙엽을 싹 긁어내듯이 파헤치겠다는 조용한 펜의 강인함이다.


  이런 면에서, 줌파 라히리는 '인도계 미국인' 작가라거나, '여류' 작가라는 범주에 넣기에 애매하다. 그녀는 인도계 이주가족의 배경을 가지고 자란 여성이지만 그녀의 소설은 이주민이라던가 여성의 정체성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  오히려 삶의 한 순간의 단면을 단칼에 내리쳐 그 단면을 찬찬히 훑는 훌륭한 작가의 냄새가 난다. 그녀의 소설 속엔 인도와 파키스탄의 다양한 향신료와 이국적인 이름과 역사들이 펼쳐지기도 하지만, 그런 배경들은 정말이지, 토속적 면모라기 보다는 소설이 가진 보편성에 기여하는 듯 하다.


  누군가가, 그녀의 소설을 두고 그랬다고 한다. 소설 속에 지문이 보이질 않는다고. 이 말에 정말 공감했다. 작가의 시선을 일부로 배제하려고 노력하며 썼는지, 소설 속에서 작가의 존재를 금방 잊게 된다. 이야기 속으로 훅 빠져들게 하는 그 덫을 아주 잘 놓는다.


  예를 들어, 첫번째로 실린 단편인 '일시적인 문제 (Temporary matter)'의 첫 문단은 이렇게 시작한다.


"안내문은 그게 일시적인 문제라고 했다. 닷새 동안 오후 여덟시부터 한 시간 동안 단전이 된다는 것이다. 지난 눈보라에 전선이 망가졌는데, 날이 덜 추운 저녁시간을 이용하여 보수작업을 한다고 했다. 이 작업은 줄지어 늘어선 벽돌집 가게와 노면 전차 정류장에서 걸어오는 거리에 있는 조용한 가로수 길가 집에만 영향을 미쳤다. 쇼바와 슈쿠마는 지난 삼 년 동안 그 동네에 살았다."



  배경지식이 없는 독자라도, 이렇게 소설이 시작되는 순간 어떤 추운 겨울의 벽돌집들과 전차가 있는 어떤 공간에 '쇼바'와 '슈쿠마'라는 이름을 가진 이들의 관계속으로 훅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저녁마다 일시적으로 1시간 가량 단전이 될 거라는 안내문과 소설 제목인 '일시적인 일'이라는 구절이 일으키는 이상한 화학작용을 느끼게 된다. 


  여러 소설가나 글쓰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같이 소설가의 '첫 문장'의 덫을 얘기한다. 첫 문장, 그 소설의 시작은 소설의 전반적 분위기와 사건의 전개를 강하게 함축한다. 혹은 은유한다. 혹은 암시한다. 김영하 소설가는 그의 소설에서 소설의 덫에 안 빠지려고 소설의 처음 장과 마지막 장은 읽지 않는 제이라는 캐릭터를 만든 적도 있지 않던가. 그래서 줌파 라히리의 첫 문장들, 이 짧은 단편들의 그 첫 문장들은 정말 강력하다. 하지만 이 '일시적인 일'의 첫 문장은 가장 강력하다. 그래서 이 소설을 제일 처음에 배치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주 잘 읽히지만 두 번, 세 번 읽어도 텍스트에서 읽어낼 것이 많은 소설집인 듯 하다. 특히 소설적 상황들. 그 상황 속에서 인물들이 연기하는 감정선. 아주 평이하면서도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