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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인가에 대하여

글로벌 노마드에 대하여

by 주말의늦잠 2022. 5. 5.

  코로나 팬데믹을 통해 바뀐 것 중 하나가 바로 일을 하는 '장소'에 대한 관념이다. 주로 지식노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국한된 것이겠으나, 전 세계 어디에 있든 컴퓨터와 인터넷만 있으면 노동을 통해 산출물을 내고, 그 산출물에 대한 댓가로 급여를 받는 삶. 글로벌 노마드. 어디에선가 듣기로는 특히 컴퓨터 공학이나 코딩 등 실제로 자기 홀로 산출물을 내는 영역의 사람들이 동남아의 어느 섬에 모여서 일하는 그런 글로벌 노마드 HQ(?)같은 동네도 있다고 들었다.

 

  나는 커리어를 해외에서 시작해서 지금까지 해외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에, 이 글로벌 노마드라는 컨셉이 내 삶에 체화되어 있다. 다만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주로 사람들은 어떤 곳에 이민을 가거나, 특정 시간동안 주로 선진국의 어떤 도시에서 일을 하고 살아가는 것을 해외생활이라고 부른다면, 내가 살고 있는 이 '해외 생활'이라는 것은 주로 개발도상국, 그리고 내가 이 커리어를 지속한다면 거의 100% 3-5년마다 나의 임지를 바꿔야 한다. 또 일반적인 이민과 다른 점이 있다. 이민을 가면 그 국가의 문화와 삶에 동화되려 노력하고, 그 속에서 좌충우돌 혹은 문화충격을 겪겠지만, 내가 걷는 이 커리어는 개발도상국에 가서 그 문화에 적응 하면서도, 동시에 다문화 컨텍스트에서 업무를 한다. 

 

  다문화, 해외생활, 국제기구... 다분히 로맨틱하고 흥미로워 보이는 단어들의 조합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굉장히 큰 정신적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것이 또 이 국제기구 커리어의 단점이다. 젊었을 때는 도전한다는 그 정신으로 업무와 삶을 대했기 때문에, 이 부분이 크게 신경쓰이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렇게 개도국에서의 생활을 즐기기도 했다. 내 나이에 이렇게 지구 반대편에서 누구나 할 수 없는 경험과 성취를 누리며 산다는 자부심도 있었다. 그런데 이 개도국 노마드 생활이 7-8년이 넘어가다보니, 지금까지는 내가 보지 못 했던 단점(?)이 느껴진다.

 

  먼저, 한 국가, 한 사무소에서 짧으면 2년 길면 5-6년 일하고 모두 다 자기의 타임라인에 맞추어 다음 임지로 떠나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인적 네트워크나 업무 코칭, 지속적인 성취감을 가질만 하면 다음 임지에서 또 refresh해야한다. 물론 이 부분을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다. 새로운 문화, 새로운 상사, 새로운 동료들과 새로운 업무를 매번 맡아서 deliver하기 위해서는 테크니컬한 역량 뿐 아니라 사실 소프트 스킬이 더 중요하다. 내가 무엇을 잘 하고, 어떤 컨텍스트에 놓였을 때 내가 내 업무와 팀에 보탤 수 있는 최대의 가치가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컨텍스트 속에서 발견하고 포트폴리오화 하고, 커뮤니케이션하고, 그러면서도 다른 모든 동료들의 문화와 가치를 알아차리며 일하는 것. 하지만 이 과정이 4-5번 정도 되풀이되고 나니 나의 포지션이나 계약적인 측면이 아니라, 업무와 함께 일하는 동료와 상사로 대표되는 업무환경이 좀 오래동안 지속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정말 마음이 잘 맞는 상사를 만나도, 그가 언제 다음 임지로 갈지 모르고.. 내가 또 다음 임지에 가서 만나는 상사나 동료가 나와 합이 맞을지도 미지수이다. 내가 나이지리아인, 피지인, 프랑스인, 태국인, 멕시코인 도대체 누구와 일을 하게 될지, 긍정적으로 본다면 다이내믹하지만 부정적으로 본다면 불확실하다. 

 

  두번째로, 이렇게 업무나 커리어 측면에서 예측가능성이 낮다보니 (불확실하다보니) 시스템 내에 불평불만이 가득한 사람들이 많다. 나 스스로도 이 시스템에 대하여 만족하지 못하는 점들이 많지만, 어쨋든 나의 선택으로 들어와서 업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어른으로서 내가 한 선택에 대해, 장점은 취하고 대신 단점은 감수해야 한다. 그런데 이 시스템 내에서 만난 참 많은 사람들이 불평불만이 많았다. 국제기구 직원으로서 기구에서 주는 그 수많은 혜택과 장점에도 불구하고, 불평하는 사람들을 상사나 동료로 만나게 되면 나로서는 참 딱한 노릇이다. 불평불만은 참 부정적인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나도 요즘에는 정말 말도 안 되게 느리고 비효율적인 행정처리 때문에 불평을 많이 하긴 했지만, 중장기적으로 보면 그 상황을 그냥 받아들이고 내가 바꿀 수 있는 부분을 찾아서 일을 해나가는 것이 맞다. 바꿀 수 없는 것에 불평하는 것보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에 내 에너지와 시간을 쏟는 것이 더 생산적이다.

 

  마지막으로, 이건 나이가 들어가면서 느끼는 건데.. 몇 년마다 이사다니고, 삶의 뿌리를 통채로 뽑아다가 이 대륙, 저 대륙 옮겨다니는 이 글로벌 노마드 인생이 더 이상 내 가치와 맞지 않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사람은 성장하고, 나이가 들면서 자신의 needs가 변화한다. 글로벌 노마드 인생이 익사이팅 하려면, 그 노마딕한 삶을 내가 선택해야 한다. 그런데 노마딕한 삶이 주는 익사이팅함 보다 내가 포기해야 하는 프라이스 태그가 높아지기 시작한 것 같다. 커리어의 성취로 본다면 더할나위 없이 즐거운 여정이지만, 나도 이제 인생의 다른 것들을 보기 시작한다. 한국에 갈 때마다 늘어난 부모님의 흰머리, 항상 참석할 수 없는 결혼식과 친구들의 출산, 내 언어로 실컷 소통할 수 있는 친구들, 노마딕한 삶이 주는 인간관계의 불확실함... 이 모든 것을 감수하고 내가 가는 길이 나에게 그 정도의 성취감과 행복을 주는가? 이게 바로 내가 요즘 나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