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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속을 걷다

몸의 일기 - 다니엘 페나크

by 주말의늦잠 2017. 5. 22.




아버지의 놀라운 선물. 이 책은 장편소설로 분류되어 있지만, 내용은 현실 기록물에 가깝다.


사회적으로 명망이 높고, 평소에는 몸에 대해 관심도 없는 듯이 행동하던 아버지가 13세부터 죽을 때까지 적은 자신의 '몸'에 대한 일기를 딸에게 남긴 것이다. 특히 일상 생활에서는 금기로 분류되는 배설이나, 성, 질병, 노화, 이상한 몸의 징후 등 - 자신이 감지한 몸의 모든 것을 기록했는데 마치 누군가의 일기를 몰래 읽는 듯이 흥미롭다. 그리고 일기의 년도에 따라 이 13살의 소년도 성장하고 늙어가고, 유럽에서 일어난 다양한 사건들 - 특히 세계대전 -이 한 인간의 몸에 미치는 영향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끼게 된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몸에 대한 담론은 저열하고, 정신과 이상에 대한 담론은 고상하다고 느끼게 한다. 나는 내 인생에서 내 몸에 일어나는 일들이 사실 너무 부끄러웠다. 너무 부끄러웠던 기억이 난다. 사춘기의 2차 성징들, 여성이라면 매 달 겪는 호르몬의 변화, 자라면서 굵어졌던 허벅지나 엉덩이에 붙는 살, 이런 것들이 부끄러웠고, 실제로 친구들 사이에서 이런 이야기를 깊게 한 기억도 없다. 고등학교 친구들이나, 대학 초년때의 친구들 중에는 이런 몸의 문제를 굉장히 정직하게 이야기하는 부류가 있었는데, 나는 솔직히 왜 사적인 이야기를 저렇게 떠벌리지, 하는 생각을 했던 적도 있다.


아마 내가 자란 환경이, 몸에 대한 담론을 더 터부시 하게 했을지도. 


그래서 '몸의 일기'는 정말 흥미로웠다.


나는 언제나 '정신의 일기'를 썼다. 그리고 여전히 '정신의 일기'만을 쓴다.

내가 경험하고, 느끼고, 생각하고, 옳다고 여기는 것들에 대한 일기를 쓴다. 하지만 오늘 내가 먹은 음식으로 인해 꾸르륵 거리는 배의 신호라든가, 불안정한 호르몬의 주기로 인한 몸의 변화, 나이가 더 들면서 생기는 몸의 신호에 대해서는 함구하거나 짧게 갈음한다. 하지만 이 잊혀진 '몸'이라는 존재는 얼마나 신비한 존재인가. 누군가의 배에 귀를 갖다대 보았다면 알 것이다. 나도 모르게 몸이 엄청나게 열심히 일하고 있음을. 밥을 먹고 때가 지나면 배가 다시 고프고, 자연스레 배설을 하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몸은 성장하고 늙는다. 이렇게 내 일상과 정신생활을 지탱해주는 몸에 대해 나는 너무나 소홀하게 대한 것 같다. 이 소홀하게 대했다는 것은, 운동을 안 하거나, 영양 섭취에 무관심 했다는 게 아니다. 나는 주기적으로 운동하고, 매 끼 균형잡힌 영양을 섭취하는 데 엄청나게 관심을 기울인다. 하지만 내 몸이 어떤 신호를 보내고, 어떻게 변화하는 지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환자들에게 '꿈 일기'를 쓰라고 권하고, 자신도 '꿈 일기'를 써서 자신의 정신 치료과 저작물에 오롯이 밝힌 바 있다. 내가 잘 이해하지 못하는 비밀스러운 것들에 대해 쓰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걸 대중에게 발표하는 것은 거의 자신의 약점을 환히 펼쳐 보이는 것 일지도. 


-


그래서 이 '몸의 일기'는 사실 좀 놀랍고 부러운 점도 있다. 아버지가 평생 몸에 대해 기록한 수천 개의 일기를 읽는 딸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버지라는 이름에 가려, 혹은 어머니라는 호칭에 가려, 우리는 자주 부모님도 한 인간임을 잊는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모두 어린 시절이 있었고, 당신들의 아버지, 어머니가 있었으며, 내가 겪는 이 성장과 노화를 그대로 겪은 한 인간임을.. 매년 나도 나이를 한 살씩 먹지만, 어머니, 아버지도 함께 늙어간다. 


시간이 지나며 정신은 성장하고 무르익고 깊어지지만, 몸은 노화한다. 피부의 탄력이 줄고, 유연성도 떨어지고, 체력도 바닥나고, 자꾸 몸에 고장이 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몸의 일기'를 읽으며 우리 사회가 '노화'를 얼마나 demonize하는지 재확인 하기도 했다. 내가 겪는 몸의 변화와 노화를 직시하고 받아들이는 것. 그것에 대해 구구절절 일기를 쓰는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알아차리고 생각해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30대에 들어선 여성으로서, '가임기 출산 지도'에 당당히 1로 count된 한 여성으로서 (이건 생각만 해도 짜증난다-_-)

몸을 가꾸는 것도 중요하지만, 몸이 겪는 다양한 사건들에 대해 공부하고 알아차리고, 생각하는 것.


이거야 말로 진짜 '개인적으로' 재미있는 프로젝트일 것 같다.


해볼까?



- 2017년,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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