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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한 오후/영화, 매체

[영화]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by 주말의늦잠 2015. 6. 9.




  아무래도 영화 제목 짓는 것에도 트렌드가 있는 모양이다. 몇 년전까지만 해도 번역가의 상상력과 유연함이 풍부하게 표현된 (-_-;) 영화 번역 제목이 눈에 띄곤 했었다. 예를 들어,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라는 영화의 제목은 '내 남자의 여자도 좋아'라고 번역되어, 3류 스페인영화스러운 향기와 함께 제목이 스포일러 폭탄을 던지는 사태를 발생시켰다. 뭐 '브라질'이라는 테리길리엄의 영화가 '여인의 음모'(ㅋㅋㅋ)로 번역되어 결국 명작을 삼류에로물 정도로 전락시키는 일도... 영화 제목에 대한 이야기는 영화평론을 하거나, 영화를 좀 본 사람들이라면 재미있는 글을 하나 쓸 수 있는 싱싱한 횟감인 듯 하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수입업자들이 영화 원제를 그대로 한글로 옮겨서 개봉하는 게 추세인가 보다. 이번에 개봉한 '매드 맥스'도 원제 매드 맥스를 그대로 한글로 쓰고 부제 Fury Road를 분노의 도로로 번역했다. 번역이라는 비지니스가 누군가에겐 반역이 될 수도 있는 만큼, 그냥 원제를 갖다 쓰는 것이 나쁜 전략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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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 도주와 돌아온 혁명군들


  매드 맥스는 사실 오랫만에 액션영화 보면서 시원하게 스트레스나 날리자, 하는 생각으로 보러 갔는데. 이게 웬걸, 장르적 스펙터클과 훌륭한 서사까지. 그리고 감독의 완고한 페미니즘. 혁명의 서사는 언제나 흥미롭다. 다스리는 자 (The Governor)와 다스려지는 자(The Governed)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 다스리는 자가 강력한 카리스마와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상황일 수록, 다스려지는 자가 음모와 배반을 꾀해 혁명이라는 하나의 이벤트를 만들어 낼 때 쾌감을 느낀다. 혁명은 실패하면 폭동이 되고, 성공하면 혁명 세력이 다시 '다스리는 자'의 지위에 오를 수 밖에 없는 숙명적 역설을 깔고 있다. 매드 맥스도 정말 간략히 말하자면 혁명의 이야기로 읽힌다. 하지만 이 서사에서 특기할 점은, 그 혁명 세력이 대부분 '여성들'이라는 점과 그들이 사실 유토피아를 향해 도주하다가, 도주를 번복하고 멋진 유턴을 통해 홈 베이스를 접수하는 점이다.



  슈퍼히어로물이나, 역사물, 액션물에서 언제나 여성의 존재는 콩고물 같은 것이 아니던가. 남성들이 타락시킨 도시를 구하는 것도 남성들이고, 남성들이 망치거나 곧 망쳐버릴 세계를 구하는 것도 남성들이다. 그 남성들의 힘겨루기 속에서 여성들은 '남자들만 많으면 재미 없으니까' 놓여지는 어떤 관상용 식물정도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말이다..)의 지위를 획득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그 여성들은 멋진 몸매에 아름다운 머릿결, 그리고 꽉 달라붙은 의상을 입고 여성미를 뽐내고 있다. 



  이 주류남성-관상용여성 히어로 방정식은 매드맥스에 적용되지 않는다. 거대한 트럭을 몰며 절대군주인 임모탄의 씨받이 여성들을 데리고 탈주해 나오는 인물은 퓨리오사다. '-사' 어미에서 볼 수 있듯이 그녀는 여성이다. 그러나 그녀에게서 여성성은 대부분 배제되어 있다. 머릿칼을 싹둑 커트쳐버렸고, 사령관으로서 가장 전투에 알맞는 의상을 입고 있다. 그리고 끝없이 얼굴에 까만색 기름을 칠하며 여성으로서의 '퓨리오사'를 상상도 하지 못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녀가 시타델의 최고 사령관으로서 임모탄이 가장 아끼는 여성들을 데리고 'Green land'로 탈출하는 행위는 페미니즘 그 자체다. 핵 전쟁 이후 검정 (기름)과 붉음 (화염과 피)이 철철 흐르는 그 세계에서, 초록 (물과 식물)과 하양 (여성들)을 원래 속했던 세계, Green land로 되돌려 놓으려는 여정. 영화에서 내가 눈물을 흘렸던 부분도, 퓨리오사가 결국 Green land의 부재에 포효하듯 울부짓는 실루엣이었다. 퓨리오사는 여성성이 지워진 캐릭터이지만 그로 인해 그녀가 향하는 '여성성'이 가장 잘 드러난다. 엄마를 잃어 절규하는 딸의 눈물..



  도주와 혁명의 여정 속에서 남성인 맥스와 워보이 1명은 조력자들이다. 이 부분을, '결국 남성들이 없이 여성끼리는 못 했을 것이다'라고 곡해하면 곤란하다. 여성들과 남성들이 함께 싸워 나아가는 여정이다. 자동차의 엔진수리나, 중대한 의사결정에서 남성들은 가장 알맞게 자신의 역할을 해낸다. 페미니스트적인 세계는, 기 쎈 여성들이 득세하여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다. 이 세계에서는 남성과 여성 모두가 자신의 역할을 해내는 세계다. 퓨리오사가 향하는 Green land로서 에코-페미니즘의 겹이 둘러졌다면, 영화 후반으로 갈 수록 정치적 진보로서의 페미니즘을 대놓고 드러내는 듯 하다. 특히 마지막에 승전보를 울린 퓨리오사와 여성들을 끌어올리는 크레인에 군중들을 다함께 데리고 탄다든지, 우유를 착출당하던 뚱뚱한 여성들이 군중들에게 아낌없이 물을 뿌려준다든지, 하는 장면에서. 인위적이지만 감독이 일부러 그렇게, 단호하게, 마지막까지, 페미니즘의 도장을 쾅쾅 찍은 느낌이다. 마지막에 '씨앗'을 허겁지겁 챙겨가는 장면, 깨알같은 페미니즘이 영화 속에 씨앗처럼 흩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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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진하는 롤러코스터 액션


  서사도 재미있지만 장르적 액션 스펙타클도 엄청나다. 한 마디로 볼거리가 풍성하다는 뜻이다. 내 친구들은 잔인해서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가리고 봤다던데. 나는 영화 러닝타임 내내 입 벌리고 액션에 흠뻑 빠져있었다. 자동차 추격전이라는 직선 방정식 속에서, 안테나에 매달린 워보이들이나 맥스가 스크린을 횡으로 가르는 모습. 가히 전방위적 공격이다. 관객들에게 전방위적 액션 스릴감을 안겨준다는 얘기다. 영화 전체적으로 추격씬이 약 4-5번은 반복되는 듯 한데,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그 스릴감은 점진적으로 상승한다. 처음엔 '헐....' 하고 보다가 두번째 추격씬에서 '뜨허....' 하고 마지막에 가면 온 몸에 소름을 털어내는 내 자신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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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쨋든 8,000원에 이렇게 통쾌하고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요즘 어디있을까 싶다. 아무래도 속편이 나오지 않을까 싶은데, 뭐 이 영화 자체도 여러가지 제작의 어려움으로 엎어지기도 하고, 원래 캐스팅 되었던 배우가 죽기도 하고 (원래 맥스가 히스 레져....ㅠㅠㅠㅠㅠ)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개봉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맥스의 캐릭터가 살짝 약해보이기도 한다. 맥스에게 계속 돌발적으로 돌아오는 죽은 여자아이의 목소리와 환영이라던가, 맥스가 퓨리오사에게 힘을 합하게 되는 마음가짐이라든지, 마지막에 홀연히 혼자 떠나버리는 이유라든지, 그런 장면들이 동떨어져서 비춰지기 때문에, 퓨리오사보다 캐릭터가 미세조정되지 않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게 바로 다음편이 나와야 할 이유가 아닐지.... (라고 하면서 다음 편 내달라고 굽신거리고 있다)



p.s. 이번 매드맥스는 나름 매드맥스 4다. 그리고 의외로 임모탄 군대에서 빨간 기타치는 워보이를 사람들이 좋아한다. 깨알 감초.